'극복'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09.03.26 [위기 극복 기업 14편] ‘엔지니어가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 R&D에 전력 / 마이크로소프트
  2. 2009.03.25 [불황 극복] 밥 빨리 먹는 사람이 일도 빠릿빠릿? 불황 무색한 일본전산의 독특한 경영법
  3. 2009.03.12 [위기 극복 기업 13편] 급행화물업체에서 카드사로 변신, 틈새시장 공략의 귀재 -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4. 2009.03.11 [불황 극복] 구성원의 ‘성과 몰입도’를 높여라 - 불황에도 매출 올릴 수 있다
  5. 2009.03.01 [위기 극복 기업 12편] 엔터프라이즈 렌터카 / 차량 17대로 시작, 현재 71만대 보유, 업계 1위로 등극한 마케팅 비결은?
  6. 2009.02.12 [위기 극복 기업 11편] 네슬레 / UN이 꼽은 세계 최고의 현지화 성공 기업 1
  7. 2009.01.23 [위기 극복 기업 10편] 코닝 / ‘깨지지 않는 기업’ 코닝, 경영환경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매출 10%는 R&D 투자
  8. 2009.01.09 [위기 극복 기업 9편] 캐논 / 캐논을 카피하라! 캐논에 포커스를 맞춰라! 불황에도 잘 나가는 비결이 캐논에 있다
  9. 2008.12.19 [위기 극복 기업 8편] 맥도날드 / 반미 상징에서 친근한 로컬 기업으로 현지화에 성공 2
  10. 2008.12.17 [2009년 국내외 경제 전망 2편] 세계 경제 / 국제 경제 공조로 금융위기 여진 극복에 힘쓰는 한 해
  11. 2008.12.16 [위기 극복 기업 7편] 월트 디즈니 / 창의성 잃었을 때 회사도 위태, 디즈니의 ‘창의성 회복’ 작전
  12. 2008.12.16 [위기 극복 기업 6편] 한 번도 안 해봤으니 이제 해보자! 아사히맥주 / 맥주 모르는 은행원 사장, 역발상으로 위기 타개의 해법을 찾다
  13. 2008.12.16 [위기 극복 기업 5편] 버버리 / 150년 트렌치코트의 위기, 30대 디자이너의 ‘버버리’ 살리기
  14. 2008.12.16 [위기 극복 기업 4편] 닌텐도 / 폭력 게임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찾다
2009. 3. 26. 19:07

[위기 극복 기업 14편] ‘엔지니어가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 R&D에 전력 / 마이크로소프트

[위기 극복 기업 14편] ‘엔지니어가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 R&D에 전력 /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는 불과 열 아홉의 나이에 ‘누구라도 컴퓨터를 쓰게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꿈은 보란 듯 이뤄졌다. ‘윈도우(Window)'라는 컴퓨터 운영시스템(OS)으로 아날로그 세상을 디지털로 바꿔 놓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매년 40%에 가까운 수익 성장률을 보이며 600억 달러(약 90조 원)의 매출을 자랑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독보적인 지위를 누려왔던 마이크로소프트도 회사의 존폐를 논할 만큼 심각한 위기에 빠진 적이 있었다. 바로 그 ‘독보성' 때문이었다. 미국을 포함한 각국이 ‘독점법 위반'을 지적하며 마이크로소프트의 성장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마이크로소프트의 태동과 혁신, 또 위기의 과정을 들여다 보자.


1975년 창업 3년 만에 매출 100만 달러 달성

 
빌 게이츠. 현대 세계 경제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다.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최근 ‘2009년 억만장자 순위'를 발표했는데 빌 게이츠는 400억 달러의 재산으로 세계 1위를 기록했다. 빌 게이츠가 단순히 부자라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서 그가 쌓은 부(富)는 ‘세상을 얼마나 변화시켰느냐'의 정도와도 비례한다.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북동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레드몬드(Redmond). 이 곳에 들어서려면 물 위의 도로를 달려 반경 300km에 달하는 워싱턴 호수를 건너야 한다. 이 한적한 시골 마을이 전 세계 컴퓨터의 운명을 쥐락펴락하고 있다고 누가 상상이나 할까. 빌 게이츠가 만든 마이크로소프트 본사는 바로 이 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

월리엄 헨리 게이츠 3세. 우리에게는 빌 게이츠로 알려진 그는 1955년 미국 시애틀의 유복한 변호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소프트웨어에 관심을 가져왔던 그는 17세에 ‘tra-o-data'라는 회사를 설립, 사내 교통량을 분석하는 컴퓨터를 만들었을 만큼 비상한 능력을 가졌다. 빌 게이츠는 1975년 미국 뉴멕시코주 앨버커크에 둥지를 틀고 마이크로소프트를 세웠다. ‘모든 가정과 책상에 컴퓨터를'이란 비전으로 출발했다.

 

그는 컴퓨터 언어프로그램인 ‘베이직(Basic)'을 개발해 승승장구하더니 포트란(FORTRAN) 등 후속 프로그램을 잇달아 선보이며 회사를 키웠다. 창업 3년 뒤인 1978년, 그는 매출 100만 달러를 달성했다. 이때 빌 게이츠의 나이는 22세. 결정적인 기회는 1981년에 찾아왔다. IBM이 마이크로소프트의 16비트 운영체제인 MS-DOS를 기반으로 한 PC를 발표했다. 이때 마이크로소프트 운영체제가 선택된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다. 당시 IBM은 우선협상대상인 디지털리서치와 협의에서 합의를 찾지 못해 차선책으로 MS-DOS를 골랐다. 당시는 이 결정이 지금의 마이크로소프트를 탄생시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뒤 1990년대 초반 윈도우 3.0을 발표하며 그 누구도 꿈꾸지 못한 성공신화를 이어 갔다.

1995년 윈도우 95, 1998년 윈도우 98, 2000년 윈도우 2000 등을 발표하며 시장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연평균 수익 성장률은 40%에 가까웠다. 인터넷 분야에서도 넷스케이프를 누르며 익스플로러가 브라우저 전쟁에서 승리를 차지했다.


반독점법 소송으로 곤혹
 

그러나 초일류기업에게는 늘 그렇듯 위기도 찾아온다. 1998년 미 법무부와 19개 주로부터 ‘반독점법 위반혐의'로 제소됐다. 2년여간 계속된 법적 공방 끝에 2000년 4월 유죄판결을 받았고 같은 해 6월 ‘운영체제(OS) 회사와 응용소프트웨어 회사로 분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판결로 마이크로소프트 주가는 대폭락했고, 금전적으로도 2억 5,000만 달러에 이르는 손실을 입었다. 다행히도 2002년 미 법무부와 합의안을 마련해 회사 분할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독점성에 소비자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MS독점에 대한 반발로 리눅스 등 오픈 소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는 자발적인 참여자들이 진보를 이뤄 내면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제품보다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개인 사용자 뿐만 아니라 기업, 공공기관까지 눈을 돌리기도 했다. 보안이 취약하다는 점을 끊임없이 지적 받으며 마이크로소프트 시스템에 불안감을 나타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보의 독점성에 대해서도 문제제기가 계속 이뤄졌다. 이런 이유로 마이크로소프트는 가장 유명한 브랜드인 동시에 ‘가장 변화해야 할 것 같은 브랜드' 1위(인터브랜드 2008년 3월 설문조사)로 꼽히는 불명예를 겪었다.


R&D 투자에 모든 것 걸어
 

빌 게이츠는 분명한 원칙을 갖고 모든 위기를 극복했다.

그 분명한 철학이란 첫째, ‘기술에 모든 승부수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엔지니어가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고 강한 어조로 말하곤 했다. 실제로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업이기에 앞서 하나의 거대한 연구소다. 레드몬드 본사의 직원이나 지역민들은 본사를 회사가 아닌 캠퍼스라고 부른다. 마이크로소프트는 IT기업 가운데 연구개발에 가장 앞장서 있다. 2007년에만 해도 69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R&D에 쏟아 부었다. 직원 9만 명 가운데 3만 명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프로그래머이기도 하다.

 

빌 게이츠의 소프트웨어가 미래를 이끌 것이라는 믿음도 기술 개발을 이끌어 낸 원동력이다. 그는 소프트웨어가 유토피아로 안내하는 도구라며 소프트웨어의 진화를 혁명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이 믿음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는 이 믿음 아래 자신의 영역에서 혁명을 이끈 것 만큼은 분명하다. 필자가 지난해 마이크로소프트 본사에서 재무담당 시니어디렉터 크리스서를 만났을 때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처럼 소프트웨어에 폭넓게 투자하는 회사도 없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만큼 기술 혁명에 모든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세계적인 불황에도 올해 약 90억 달러를 R&D에 투자한다. 올해 총 기대매출인 600억 달러의 15%에 해당하는 금액을 쏟는 것. 인원 감축 압박에도 연구 인력 3,000명을 늘릴 방침이다.

둘째, 빌 게이츠는 늘 최악을 염두에 두면서 경영했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 가장 마이크로소프트답다”는 말을 자주했다. 리눅스가 공세적으로 나올 때 그는 부분적으로 프로그램 소스를 무료화해 MS의 독점성을 고집하지 않았다.

 

마지막 하나 더. 훌륭한 동반자는 위기 극복의 힘이다. 마이크로소프트를 말할 때 주저 없이 빌 게이츠를 떠올리지만, 스티브 발머가 없었다면 지금의 마이크로소프트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위기 때 마다 빌 게이츠를 도왔다. 빌 게이츠가 기술자이고 전략가이며 총 사령관이라면, 스티브 발머는 사업가이자 모사(謀士)이자 야전사령관이라고 평가된다.

스티브 발머는 인사·회계·법무 등 회사 운영에 관한 책임을 맡아 시스템을 개혁시켰다. P&G에서 브랜드관리와 마케팅 등의 실무경험을 쌓아 초기 벤처기업을 시스템을 갖춘 글로벌 전문 IT기업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특히 인재를 발굴하는 데 탁월했는데, 헝가리 출신의 천재적인 프로그래머 찰스 시모나이를 찾아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램 개발을 성공시킨 시모나이는 다시 친구 프로그래머 리처드 브로디를 추천했다. 스티브 발머가 인재발굴의 정점에 서있었던 셈이다. 그는 윈도우 운영체제 선적부터 최고급 인재 공급까지 모든 부문을 책임지고 있어 빌 게이츠보다 공로가 더 큰 인물로 꼽힌다.

올해 마이크로소프트의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최근 PC 교체가 줄어 윈도우 판매가 줄었다. 사무용 소프트에어와 윈도우 서버 등 기업용 소프트웨어 판매도 부진하다. 그러나 위기에는 ‘기본 경영'이 빛을 낸다. 마이크로소프트에 있어서 기본 경영은 기술 중시 경영이다. 올해가 다윈 탄생 200주년, 진화론 발표 150주년 되는 해이기도 하지만, 진화에서 이기는 것은 강한 것이 아니라 환경의 변화에 가장 잘 순응하는 생물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런 관점에서 디지털과 인터넷 세상의 변화를 가장 잘 따르고 있는 듯 하다. 빌 게이츠는 물러났지만 기술 중시와 변화의 전통은 마이크로소프트를 100년 넘는 장수 기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 명순영 / 매경이코노미 기자

출처 : 삼성(www.samsung.co.kr)

2009. 3. 25. 19:57

[불황 극복] 밥 빨리 먹는 사람이 일도 빠릿빠릿? 불황 무색한 일본전산의 독특한 경영법

[불황 극복] 밥 빨리 먹는 사람이 일도 빠릿빠릿? 불황 무색한 일본전산의 독특한 경영법


“즉시 한다. 반드시 한다. 될 때까지 한다.”

필자가 이 문구를 처음 본 건 성남의 한 중소기업을 방문해서였다. 30명 남짓 모인 사무실 벽 한쪽에 걸린 플래카드에 이 문구가 적혀 있었다. 보는 순간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마치 대입 시험을 앞둔 고3 수험생의 각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구호가 일본전산(日本電産)의 핵심 모토였다는 건 나중에 취재를 통해서 알았다. 사실 이 중소업체는 한 가지 모토가 더 있었다. ‘안 되면 비기기라도 하자.'

 

처음부터 우수한 인재가 어디에 있는가?
 
요즘 CEO들 사이에서 일본전산(日本電産)의 경영방식이 화제다. 회사 창업자인 나가모리 시게노부 사장이 신입사원을 ‘밥 빨리 먹기', ‘큰 소리로 말하기', ‘화장실 청소하기' 등으로 뽑는 일이나 채용한 구성원을 눈물이 쏙 빠지도록 수시로 혼내는 그의 행동을 보면서 무릎을 ‘탁' 치는 CEO들이 많다는 후문이다. 일반인들도 ‘될 때까지 하라'고 말하는 그의 무대뽀식 호통 경영에 깊은 공감을 표시한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일본전산에 열광하는 것일까.

일본전산은 일류가 아닌 비교적 평범한 사람들이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시킨 기업이다. 나가모리 시게노부 사장이 처음 신입사원을 밥 빨리 먹기, 큰 소리로 말하기 등으로 뽑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구성원은 네 명에 불과하고 매출 실적도 적은 중소기업에 지원하는 인재가 일류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 그래도 사장은 좌절하지 않았다. 밥을 빨리 먹는 사람이 소화도 잘 시키고 일도 빠릿빠릿하게 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좀 황당하긴 하지만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논리다. 사실 학교 성적과 일 잘하는 것이 별개라는 건 사회생활을 통해 누구나 알 수 있다. ‘처음부터 우수한 인재 따위는 없다'는 게 나가모리 사장의 지론이다.

메이저 리거가 즐비한 다른 나라와 달리 국내 선수로만 구성된 한국 야구대표팀은 탄탄한 기본기와 성실한 자세로 WBC에서 세계 언론의 극찬을 받았다. 일본전산의 구성원도 남들이 볼 때는 2, 3류 인재였지만 일하는 순간에는 세계 최고를 지향했다. 지독하리만큼 우직하고 끈질기게 일에 매달려 목표 이상의 결과를 이뤄 냈다.

 


한 마리의 늑대가 이끄는 99마리의 양

 
아무리 일 잘하는 사람을 뽑았다고 해도 그들을 잘 조련하지 않으면 이합집산에 불과하다. 나가모리 사장이 강연회에서 자주 쓰는 비유를 들자면 ‘한 마리 늑대가 이끄는 99마리의 양 집단과 한 마리 양이 이끄는 99마리의 늑대 집단이 서로 싸운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나가모리 사장은 한 마리의 탁월한 늑대 역할을 했다. 구성원에게 비전을 심어 주고 끊임없이 열정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사실 ‘맨 땅에 헤딩' 수준의 요구와 명령이 있었음에도 구성원들이 이를 공감하고 따를 수 있었던 건 나가모리 사장 스스로가 솔선수범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떻게 좋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한다. 필자는 최근 리더십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한 업체 대표를 만나 리더십에 대한 혜안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리더십은 바로 행동'이라고 정의했다. “리더십은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행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문제도 알고 보면 해결책을 앞에 두고 빙빙 고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문제가 해결될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나 두려움 때문에 행동으로 못 옮기는 것뿐입니다.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 리더십이 생깁니다.”

나가모리 사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들이 불가능이라고 여겼던 일을 본인은 먼저 행동하고 실천함으로써 다른 사람도 함께 움직이도록 하고 결국 불가능해 보였던 문제도 해결했다. ‘과정이 중요할뿐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라는 말도 실제 최선을 다해 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단 한 마리의 늑대가 99마리의 양을 늑대처럼 만들 수 있을까. 작은 기업이면 몰라도 큰 조직이라면 어렵다. 결국 조직을 바꾸는 힘은 개인 하나로 되는 게 아니라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함께 조직문화를 바꿀 때 이룰 수 있다. 나가모리 사장의 지론에 따르면 ‘스스로 불타오르는 사람(열정)'은 100명 중 10~15명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조직에 열정을 불어넣는 사람은 소수이다. 이런 사람을 사장, 임원, 팀장으로 만들어야 조직이 달라질 수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의 이야기>를 보면 백인대장의 중요성이 자주 언급된다. 회사 조직으로 따지면 팀장급인 백인대장은 로마 군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카이사르가 불리한 전황과 여건 속에서도 승승장구했던 비결은 현장 경험이 풍부하고 부하 통솔력이 뛰어난 백인대장을 중용했기 때문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어려울 때일수록 현장에 충실하고 통솔력이 뛰어난 사람을 요직에 둘 때 기업은 튼튼해진다. 나가모리 사장이 수시로 혼내고 닦달했지만 구성원들은 불평 한마디나 싫은 기색을 하지 않고 오히려 더 열심히 일했다. 그건 그가 그만큼 몸으로 뛰고 움직였기 때문이다.

 


일요일에도 고객을 찾아 감동 전달

 
위에서 두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인재란 만들어지는 것이고 둘째, 리더십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불황을 극복하는 키워드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현장 중심 경영'이다. 문제가 발생하는 현장은 고객의 니즈를 가장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곳이다. 현장을 무시하고 책상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할뿐만 아니라 시간도 오래 걸린다.

건설사에 다니는 필자의 친구가 들려준 얘기다. 건설현장의 빌트인 가전제품에 문제가 생겨 A사와 B사에 연락을 했는데 대처방법이 크게 달랐다는 것이다. 토요일이었는데 B사는 접수만하고 월요일에 구성원을 보내겠다고 한 반면 A사는 일요일인 다음날 아침 일찍 구성원이 와서 문제를 해결해줬다는 것이다. 고객이 A사에 마음을 뺏긴 건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비슷한 사례가 일본전산에서도 나온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즉각 행동으로 옮기면 최선의 결과가 나온다. 고객감동경영은 바로 현장을 챙길 때 나온다.


꾸짖음이 구성원의 스피드를 올린다

또 다른 키워드는 ‘스피드'다. 나가모리 사장을 비롯한 주요 임원들은 수시로 구성원을 꾸짖었다. 관심의 표현이자 자극을 통해 구성원의 의식을 바꿔 놓기 위함이었다. 동기부여가 된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일을 찾아 문제를 해결했는데 그 속도가 빨랐다. 회사 모토인 ‘즉시 한다'가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리더가 현장에서 직접 직원을 챙기고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부족한 게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 주면 부하직원은 발빠르게 움직이게 돼 있다. 단순히 일을 못한다고 혼내면 결국 서로 짜증만 나고 조직 분위기는 흐트러진다.

 


누가 먼저 행동으로 옮길 것인가

 
1973년 초라한 창고에서 시작한 일본전산이 지금은 매출 8조 원의 글로벌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전 세계에 140개 계열사가 있으며 구성원만 13만 명에 이른다. 일본전산의 성장과정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일본전산의 성공 요인을 하나씩 따져 보면 우리가 과거 한 번씩은 경험하고 들어본 일들이다. 겉모습은 조금 색다르게 보이지만 결국 이면의 성공요인은 크게 다르지 않다. 큰 비전과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두려움 없이 행동하는 열정이 바로 그것이다. 불황일수록 누가 열정을 가지고 행동으로 옮기느냐에 따라 기업의 성패도 달라질 것이다.


- 김충일 / 매경이코노미 기자

출처 : 삼성(www.samsung.co.kr)

2009. 3. 12. 21:53

[위기 극복 기업 13편] 급행화물업체에서 카드사로 변신, 틈새시장 공략의 귀재 -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위기 극복 기업 13편] 급행화물업체에서 카드사로 변신, 틈새시장 공략의 귀재 -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투자의 귀재인 워렌 버핏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몇 개의 글로벌 기업에 큰돈을 투자했다. 그는 주로 핵심역량을 가진 장수기업의 주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대표 기업이 코카콜라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다.

존 웨인 주연의 서부극을 보면 은행강도가 자주 등장하는데 은행의 이름은 늘 ‘웰즈 파고'였다. 웰즈 파고 은행은 당시 미국 은행의 대명사였다. 웰즈 파고는 바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창시자 헨리 웰즈와 윌리암 조지 파고의 이름을 합친 것이다. 159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긴 세월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만들어 냈다.
 

증권·화폐 배달의 틈새시장을 공략
 
1850년 미국 뉴욕에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라는 회사가 만들어졌을 때는 카드업이 태동하지도 않았을 때다. 오늘날 특급열차를 뜻하는 ‘익스프레스'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첫 출발은 급행화물 배달업이었다. 당시 미국의 우편 서비스는 느리고 비쌌다. 편지 같은 소형 우편물 정도를 배달하는 데 그쳤을 뿐만 아니라 배달 지역도 한정돼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이때 화물서비스 업체는 말과 마차를 타고 동부와 서부를 신속하게 오갔다. 화물뿐 아니라 금과 화폐 등 귀중품을 성실하게 배달했다. 여러 운송서비스 업체들 가운데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가장 믿을 만한 업체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물 운송량이 크게 늘어나지 않아 수익 또한 늘지 않았다. 이때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틈새를 노리기 시작했는데 바로 은행이었다. 은행으로부터 주식, 어음, 돈 등을 배달하는 것은 일반 화물을 운송하는 것보다 훨씬 수익이 좋았다.

성실하게 배달하면서 고객들의 믿음도 쌓여 갔다. 신뢰와 안심이라는 단어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를 규정짓는 브랜드 가치가 됐다. 초창기 광고를 보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라고 쓰인 상자 위에 하얀 개 한 마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상자를 지키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1882년 선보인 여행자수표 대성공

 
1882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우편환(money order) 사업에 뛰어들었고 1891년에는 세계 최초로 여행자수표를 발행했다. 이 사업은 큰 성공을 거둬 당시로는 큰돈인 6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가 운송회사가 아닌 금융회사로 전환하는 순간이었다. 그 뒤 영국 등 유럽으로 사업을 넓혔고 외환업에도 뛰어들어 명실상부한 금융사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기회는 위기 속에서 찾아왔다. 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미국인들은 국경 폐쇄와 은행 서비스 정지로 혼란에 빠졌다. 유럽의 은행들은 여행자들에게 돈을 내어 주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여행객들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가 발행하는 여행자수표를 이용했다. 이때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성의를 다해 여행자의 귀국 수속을 도와주었고 전쟁 중에도 유럽 사무실의 문을 열고 여행자수표를 고객에게 유리한 환율로 현금화해주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절대 고객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신화를 굳건히 했다.

2차 세계대전 역시 위기이자 기회였다. 전쟁 중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전쟁이 끝난 이후를 준비했다. 따라서 종전 후 어느 회사보다 먼저 유럽 현지에 영업소를 재건할 수 있었다. 전쟁 직후 유럽대륙에서 유일하게 문을 연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영업소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세계여행'이라는 등식을 만들어 냈다. 또 미국 정부와 제휴를 맺어 해외에 머물고 있는 미군 및 가족들을 위한 군용은행 사업을 시작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가 신용카드를 발행한 것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58년이다. 결제시스템이 완비되지 않았던 시대에 시작한 카드사업은 손실만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이 시기를 잘 견뎠다. 결국 신용카드는 모든 사람들의 필수품이 됐고 5년 만에 흑자로 돌아서 100만 장이 넘는 카드를 발급했다.

 
다각화하다 위기 찾아와

그러나 이렇게 승승장구할 때 더 큰 위기는 찾아오는 법이다. 1970년대 말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다양한 사업군을 가진 글로벌 대기업이 되기를 원했다. 그 손쉬운 방법은 인수합병이었다. 그래서 세어슨 로프 로즈(Shearson Loeb Rhoades), 퍼스트 데이터 리소시스(First Data Resources), 트레이드 디벨롭먼트 뱅크(Trade Development Bank), 리먼 브라더스 쿤 로브(Lehman Brothers Kuhn Loeb) 등을 마구 사들였다. ‘금융슈퍼마켓'을 지향한 것이다.

하지만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사례는 장기적인 비전이 없는 사업 다각화의 위험성을 보여 준다. 수많은 사업을 통해 교차판매를 시도했지만 얻은 것은 비대해진 비용구조뿐이었다. 경영자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산만한 금융 사업 포트폴리오는 고객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았으며 시너지도 크지 않았다. 주가도 곤두박질쳤다. 1990년대 들어 시가총액은 40% 이상 떨어졌고 기업을 매각할 것이라는 루머도 횡행했다.

결국 위기를 벗어나는 해법은 다시 핵심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다각화에 대해 주주들의 비판이 이어지는 가운데 하비 골럽(Harvey Golub)과 켄 체널트(Ken Chenault)라는 새로운 경영진이 나섰다. 그들은 곧바로 20억 달러 규모의 비용절감에 착수했고, 카드라는 핵심사업(core businesses)으로 돌아섰다.

 

두 경영자는 ‘모든 고객에게 탁월한 가치를 제공한다', ‘동종업계에서 최고의 경제성을 달성한다', ‘모든 기업 활동에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브랜드를 강화한다'는 3대 경영원칙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금융백화점이 되겠다는 비전으로 인수했던 기업 상당수를 매각했다.
긴축과 구조조정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매출은 상당수가 법인고객의 출장 용도였다. 시장이 너무 좁았다. 반면 경쟁업체인 비자(VISA)와 마스터카드(MasterCard)는 개인고객 시장을 파고들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지출액이 높은 고객군을 파악한 후 이 그룹에 맞는 상품을 개발했다. 제품 개발 사이클을 정확히 파악하고 통합 프로세스를 구축해 2년이나 걸리던 신상품 개발 기간을 1개월까지 단축시켰다.

그 결과 출장비와 접대비가 매출의 70%를 차지하던 구조에서 30% 수준으로 줄이고, 고객의 실제 소비패턴을 반영하는 구조로 전환시켰다.


전략이 옳아야 위기를 벗어나는 속도도 빨라져

너무 많은 상품을 발행하는 것이 또 다른 위험요인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을까? 이에 대해 체널트 사장은 “더 많은 상품을 출시한다는 것은 서비스를 하는 입장에서는 분명 복잡성을 늘린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서비스 품질이 하락하지 않고, 오히려 향상되는 방향으로 역량을 집중했다”고 밝히고 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150년을 이어 온 브랜드의 힘과 고객 정보 등 숨겨진 자산을 잘 활용할 수 있었다.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또 한 번의 위기를 맞고 있다. 하지만 요즘 어느 누구도 위기라는 단어를 피해갈 수 없듯이 이번 경기침체의 골이 깊고 넓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위기는 반드시 끝난다. 다만 전략적 방향 설정이 옳아야 그 속도가 빨라진다. 강력한 브랜드와 고객 기반을 바탕으로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매진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사례는 위기 극복 사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 명순영 / 매경이코노미 기자

출처 : 삼성(www.samsung.co.kr)

2009. 3. 11. 19:07

[불황 극복] 구성원의 ‘성과 몰입도’를 높여라 - 불황에도 매출 올릴 수 있다

[불황 극복] 구성원의 ‘성과 몰입도’를 높여라 - 불황에도 매출 올릴 수 있다


회사의 생산성을 30% 높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과연 무엇이 구성원으로 하여금 30% 이상 더 노력하고 열심히 일하게 만들까? 그 정답은 바로 ‘성과 몰입(engagement 혹은 work engagement)'이다. 성과 몰입이란 회사의 이익과 경영성과 향상을 위해 구성원이 자발적(voluntary)으로 혹은 자율적(discretionary)으로 하는 노력을 말한다. 성과 몰입이 높은 구성원은 자신이 하는 일에 완전히 몰두하는 경향이 강하며, 일에 대해 열정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


몰입의 효과, 고객 만족도를 높인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성과 몰입도가 높은 회사들은 조사 기간 중 영업이익이 19.2% 증가한 반면, 성과 몰입이 낮은 회사들은 같은 기간 영업이익이 32.7% 감소했다. 또 한 회사의 여러 팀 간 성과 몰입 정도를 측정하고 매출을 비교했더니 팀원들의 몰입도가 높았던 팀은 그렇지 못한 팀보다 연평균 매출이 약 100만 달러 정도 높았다.

그리고 몰입도가 높은 팀일수록 팀원들의 이직률이 낮아지는 현상을 발견했다. 중장비 건설 기계업체인 캐터필러에서는 직원의 몰입도를 높이는 사업을 추진한 결과 직원의 불만 표출건수가 무려 80%나 감소하고 고객 만족도가 34% 증가했다고 한다.

 

이런 긍정적인 결과 덕분에 최근 많은 미국 기업들은 구성원의 성과 몰입을 회사의 성과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다. 주기적으로 성과 몰입도를 측정하고 이를 향상시키려는 몰입경영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미국의 가장 큰 은행 중 하나인 와코비아는 구성원의 몰입을 관리하는 부서가 따로 있고 이 부서를 책임지는 중역에게 ‘Vice President for Employee Engagement and recognition'이란 타이틀까지 부여하여 구성원 몰입경영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경기가 침체되고 불황이 깊어질수록 구성원의 성과 몰입도는 낮아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즘 같이 불황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몰입경영은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몰입의 중요성을 알고 있어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를 알지 못해 몰입경영이 실패로 돌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구성원의 성과 몰입도를 어떻게 측정하며 몰입경영을 어떻게 실천하는지 알아보자.


성과 몰입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몰입경영에 관심이 있는 리더들이 이를 실천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현재 조직 내 구성원들의 몰입도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것이다. 측정 도구로는 간단한 설문지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 갤럽, 머서, 휴잇, 와슨와이어트 등 미국의 인사/조직 컨설팅 회사들은 구성원의 몰입을 측정하기 위해 설문지를 자체 개발해 사용하고 있다.

구성원의 몰입도를 측정하는 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설문지는 갤럽이 개발한 ‘Q12'라는 것인데 1999년에 마커스 버킹햄과 코프만이 지은 라는 책 덕분에 유명해졌다. Q12는 인간 심리의 부정적인 측면보다 긍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춰 인간의 행동, 특히 동기부여와 변화 리더십 등을 설명하려 했던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에 기초를 두어 개발되었다. Q12의 대표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출처: < First, Break All the Rules >, p.28)

- 직장에서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 매일 업무 중에 최선을 다할 기회가 주어지는가?
- 지난 7일 동안 업무에 대한 칭찬이나 인정을 받은 적이 있는가?
- 직장 내에 내가 발전할 수 있도록 독려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 회사의 목표나 목적을 보면 나의 업무가 중요하다고 느껴지는가?
- 작년에 나의 직무와 관련하여 학습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었는가?

 

Q12가 몰입을 측정하는 데 가장 널리 쓰이기는 하지만 조직 구성원의 몰입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요소 (예를 들면 리더십, 업무환경, 합리적이고 공정한 보상, 조직 문화에 대한 자긍심 등)가 포괄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인터뷰 같은 보완적인 방법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조직 내 몰입 수준의 정확한 측정이 가능하다.

구성원의 몰입 수준을 보다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항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조직 내 특정 그룹이나 직급 또는 연령에 치우치지 않고 최대한 다양한 그룹을 대상으로 측정해 조직의 총체적인 몰입 상태와 동시에 세부 그룹의 몰입 수준을 동시에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몰입의 가장 중요한 결과이자 대상인 고객이 느끼는 구성원의 몰입도를 같이 측정해 외부에서 느끼는 구성원의 몰입 수준을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셋째, 몰입 수준을 측정하는 것이 잠시 지나가는 유행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조직의 최고경영자가 몰입의 중요성에 대해 지속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몰입에 대한 측정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울러 내부 리더의 업무 평가에 구성원의 몰입 수준이 포함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몰입을 측정할 때 직원에게 측정 결과는 어떻게 사용되며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직원은 그저 설문으로 인식하게 된다. 또한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에 대한 액션 플랜과 결과를 적극적으로 공유해야 한다.


몰입경영,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몰입경영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란 문제는 다양한 논의가 필요하지만 구성원의 몰입도가 높은 회사를 만들려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중점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첫째, 최고경영자가 구성원의 경력 개발에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구성원이 성장한다는 느낌을 항상 가지고 있게 한다.

둘째, 물질적·정신적 보상을 충분히 제공해 성공적인 업무 수행에 대한 보상이 잘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하지만 정신적 보상을 통한 내적 만족감과 물질적 보상을 통한 재정적 만족감이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 몰입경영 측면에서 더욱 중요하다.

셋째, 구성원이 조직에 대한 자긍심을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 연관 활동을 전개해 대외 이미지 제고에 노력한다.

넷째, 구성원이 업무 이외의 영역에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사내 커뮤니티 조성과 활동을 지원한다. 이를 통해 구성원은 다양한 리더십 경험을 쌓을 수 있다.

다섯째, 업무를 추진하는 데 명확한 방향 설정과 결과에 대한 책임 소재의 확실한 정의는 구성원의 몰입도를 높이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리더는 부하 직원에게 명확한 업무 분배와 결과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통해 자신의 일에 몰입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미국의 많은 서비스 회사들은 구성원의 몰입도를 주기적으로 평가하고 이들의 몰입에 영향을 주는 요소를 파악해 이에 대한 최적의 솔루션을 제공하는 데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업이 리츠칼튼 호텔이다. 이 회사는 구성원의 몰입도를 서비스 향상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파악하고 2006년부터 몰입도를 측정하기 위한 설문을 주기적으로 실시해 오고 있다.

이렇게 측정된 데이터는 매해 최고경영자와 HR 담당 임원에 의해 세심하게 분석되며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회사가 전략적으로 추진해야 할 일을 분기별로 계획해 실천하고 있다. 최고경영자의 지속적인 관심으로 리츠칼튼 호텔은 서비스 산업에서 구성원의 몰입도가 가장 높은 조직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는 고객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 되었다.

리츠칼튼 구성원의 높은 몰입도는 최상의 서비스 이외에도 회사에 여러 가지 형태의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예를 들면 럭셔리 호텔의 이직률이 일반 직원이 연간 158%, 초급 관리자가 연간 136% 그리고 중간 관리자가 129% 인데 리츠칼튼의 이직율은 불과 18%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몰입의 중요성을 잘 나타내 준다.

구성원의 몰입을 높이는 요소는 다양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주인의식이 아닐까 싶다. 주인의식이야말로 평범한 기업을 위대한 기업 또는 살아 있는 기업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확신한다. 필자가 리더십 강의를 위해 많은 기업들을 방문해 다양한 계층의 리더들과 이야기하면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조직 구성원 하나 하나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경쟁기업이 쉽게 모방할 수 없는 진정한 의미의 지속 가능한 경쟁우위(sustainable competitive advantage)일 것이다. 주인의식을 통한 몰입경영이야말로 지금과 같은 불황기에 모든 리더들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이슈이다.


- 정동일 / 연세대학교 경영대 교수

출처 : 삼성(www.samsung.co.kr)

2009. 3. 1. 08:30

[위기 극복 기업 12편] 엔터프라이즈 렌터카 / 차량 17대로 시작, 현재 71만대 보유, 업계 1위로 등극한 마케팅 비결은?

[위기 극복 기업 12편] 엔터프라이즈 렌터카 / 차량 17대로 시작, 현재 71만대 보유, 업계 1위로 등극한 마케팅 비결은?


경영 현장에서는 레드오션(Red Ocean), 블루오션(Blue Ocean)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잘 알려졌다시피 레드오션은 경쟁이 너무 치열해 이익을 내기 어려운 시장이고, 블루오션은 바다와 같이 많은 기회가 녹아 있는 신시장을 말한다.

레드오션으로 언급되는 대표적인 산업 가운데 하나가 바로 렌터카 시장인데, 최근 ‘엔터프라이즈 렌터카'가 기존 렌터카 시장의 강자인 허츠(Hertz)와 에이비스(Avis)를 제치고 미국 내 업계 1위로 올라섰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선두를 차지한 엔터프라이즈 렌터카의 성공 비결을 찾아 보자. 


선두주자 따돌리고 미국 내 1위로 성장한 엔터프라이즈

렌터카 시장은 진입장벽이 낮다. 쉽게 말하자면 자동차를 몇 대만 갖고 있어도 시작할 수 있는 게 렌터카 사업이다. 하지만 진입장벽이 낮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렌터카 시장에 많은 기업들이 눈독을 들이고 진입하지만 살아남은 기업은 몇 되지 않는다. 버티기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시장으로, 결국 글로벌 렌터카 시장은 허츠(Hertz)와 에이비스(Avis)의 양분 구조로 정착됐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지만 최근 미국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렌터카 회사가 있다. 바로 엔터프라이즈 렌터카(Enterprise rent-a-car, 이하 엔터프라이즈)다. 1957년 겨우 17대의 렌터카로 사업을 시작한 엔터프라이즈는 전 세계 71만 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고, 허츠와 에이비스를 제치고 미국 내 업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 렌터카 업계가 전체적으로 3%대의 낮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음에도 엔터프라이즈는 연평균 14%의 고성장에 10% 가까운 수익을 올리고 있다. 실제로 미국을 여행하다 보면 허츠나 에이비스보다도 엔터프라이즈의 매장을 더 자주 볼 수 있다.

 


엔터프라이즈 매장은 공항 대신 주택가에

렌터카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공항일 것이다. 렌터카는 보통 여행이나 비즈니스 출장 온 사람들이 이용한다. 이처럼 타지에서 온 고객을 잡기 위해서 렌터카 업체 직원들은 치열하게 경쟁을 벌인다. 렌터카 업체들이 공항 안팎에 사무실을 두는 이유다.

그런데 엔터프라이즈는 독특하게도 공항에 사무실이 없다. 대신 주택가에 사무실을 두었는데, 위치를 분석해보니 미국 인구의 90%가 엔터프라이즈 사무실 근처 15마일 이내에 살고 있었다. 이는 엔터프라이즈가 여행객 외의 다른 틈새 시장을 파고든 것을 의미한다. 자동차 고장과 정비 등의 문제로 렌터카가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엔터프라이즈가 겨냥한 틈새 고객인 것이다. 엔터프라이즈는 각 지역의 정비소와 네트워크를 맺었고, 정비소는 자연스럽게 동네에 위치한 엔터프라이즈를 추천하게 된다.

엔터프라이즈의 또 다른 강점은 저렴한 가격이다. 땅값이 비싼 공항 대신 저렴한 교외 지역에 차고가 있으니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해서 절약한 비용은 렌터카 가격을 인하시키는 긍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주택가의 고객을 위한 전략은 아주 효과적이었고, 이로 인해 엔터프라이즈는 1957년 사업을 시작한 이래 큰 위기를 겪지 않고 사업을 키울 수 있었다.


우리가 당신을 데리러 갑니다

2001년 발생한 9·11 테러는 다른 사업분야와 마찬가지로 렌터카 업계 또한 초토화시켰다. 여행객이 줄어들면서 렌터카 수요도 줄어든 것이다. 주택가 중심으로 영업을 하는 엔터프라이즈도 피해갈 수 없는 위기였다. 그러나 엔터프라이즈는 또 다른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고객 중심의 문화다.

엔터프라이즈는 한때 “엔터프라이즈를 고르세요. 우리가 당신을 데리러 갑니다(Pick Enterprise. We'll pick you up)”라는 TV광고 카피를 선보인 적이 있다. 실제로 엔터프라이즈는 소비자가 렌터카를 원하면 직접 찾아 간다. 이것은 두 가지 효과를 낳았는데, 첫째는 고객이 번거롭게 움직일 필요가 없어 서비스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차 안에서 고객과 만나고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직원들은 항상 정장 차림을 하고 고객과 대화를 하면서 최적의 차종과 렌트 방식을 추천해준다. 1대1로 친절하게 상담을 하고 나면 고객과 기업 간의 친밀감이 형성된다. 게다가 차를 다소 늦게 반납해도 추가 요금을 받지 않았다. 이처럼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다양한 서비스는 엔터프라이즈의 막강한 경쟁력으로 작용했다.

 


고객 감동, 충성도 높은 입소문 마케팅으로 이어진다

주택가에서 쉽게 만날 수 있고, 직접 찾아 오고, 게다가 가격까지 저렴하니 많은 고객들이 엔터프라이즈에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엔터프라이즈 고객들의 95%는 ‘매우 만족한다'고 답했다.

엔터프라이즈는 순추천지수(NPS)라는 지표를 활용했다. 순추천지수란 거래하는 회사를 친구나 동료에게 추천할 의향이 있는가라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고객 충성도를 측정하는 방법이다. 1~10의 척도를 사용하는데 9~10점을 준 고객은 추천고객으로, 7~8점은 중립고객, 1~6점은 비추천고객으로 분류된다. 엔터프라이즈는 NPS를 측정해 9~10점의 충성도가 높은 고객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충성고객이 반복 구매하면 매출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와 함께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는 바로 입소문이다. 마케팅 부서를 대신해 고객이 지인들에게 엔터프라이즈를 광고하고 다녀 실제 고객 획득 비용이 감소하는 효과까지 발생했다. 절감된 비용은 가격 인하의 형태로 고객에게 혜택이 돌아가고, 동시에 회사 수익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엔터프라이즈의 매출은 2000년 56억 달러에서 2008년 101억 달러로 상승하기까지 한 번도 하향세를 타지 않았다.

최근 경기침체는 또다시 렌터카 업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엔터프라이즈도 역시 어려움을 겪어, 구조조정의 상황을 맞았다. 그러나 엔터프라이즈는 다른 경쟁사에 비해 최악의 경기침체에도 꿋꿋이 잘 버티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틈새 시장을 공략하는 지혜, 고객 중심의 사고방식과 경영, 입소문 마케팅 등은 상식에 가까운 기본경영으로써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엔터프라이즈는 최근 환경을 우선하는 녹색 경영을 실천하고 있다. 매년 ‘백만 가구 나무심기' 운동을 하는가 하면 렌터카에도 하이브리드카를 도입했다.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변화에 발빠른 엔터프라이즈의 앞날이 밝아 보이는 이유다.


- 명순영 / 매경이코노미 기자

출처 : 삼성(www.samsung.co.kr)

2009. 2. 12. 20:46

[위기 극복 기업 11편] 네슬레 / UN이 꼽은 세계 최고의 현지화 성공 기업

[위기 극복 기업 11편] 네슬레 / UN이 꼽은 세계 최고의 현지화 성공 기업


네슬레는 무려 150년 가까이 이어 온 장수기업이다. 장수기업은 ‘반드시'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위기 상황을 맞곤 한다. 네슬레에게 위기 때마다 힘이 된 것은 바로 창업정신이었다. 죽어가는 유아를 살리자는 공익적 취지는 안전 제일주의 식품 회사로 커 가는 밑바탕이 됐다.

한편, 네슬레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라는 큰 위기를 겪으면서 두 가지 중요한 전략을 세웠다. M&A를 통한 사업 다각화 전략으로 다국적 식품 회사로 성장했고, 철저한 글로벌화와 현지화 전략으로 전 세계 80여 개 국가 500여 개 도시에 진출했다. 철저하게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 나가 현지에서 뿌리를 내렸다.


지금은 영향력이 조금 약해졌지만 10년 전쯤 소니(SONY)는 난공불락의 세계적인 IT 기업이었다. 당시 일본의 모 신문사 국장이 이데이 노부유키 사장을 인터뷰하면서 “소니도 벤치마킹을 하는 기업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많은 기업이 소니를 벤치마킹하는 상황이었지만 소니도 무언가를 닮고 싶은 기업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잠시 고민하던 이데이 사장은 이렇게 답했다.
“사업 포트폴리오는 유럽의 ABB와 미국의 GE입니다. 제조업은 휴렛팩커드(지금의 HP)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브랜드와 시너지 효과는 네슬레를 벤치마킹합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위기를 기회로 바꾼 기업은 스위스에 본사를 둔 식음료 기업 네슬레(Nestle)다. 네슬레에는 어떤 힘이 있기에 당시 세계 IT 경제를 쥐락펴락했던 소니도 배우고 싶다고 했을까?


1860년 모유 대체 식품으로 개발
 

네슬레의 탄생은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또 자못 진지하기까지 하다. 1860년대 당시 숙련된 약사였던 앙리 네슬레는 모유를 먹일 수 없었던 어머니들을 위해 모유 대신 유아의 영향을 보충해 줄 식품을 개발했다. 궁극적인 목적은 영양실조로 인한 유아의 사망률을 낮추는 것이었다.

그는 우유와 밀가루, 설탕 등을 조합하는 다양한 실험을 한 끝에 모유 대신 먹일 수 있는 우유와 비슷한 액체 성분인 ‘페린락테(farine lactee)'를 개발했다. 첫 고객은 모유나 기존 대체 식품을 소화하지 못해 의사들도 가망이 없다고 포기한 미숙아들이었다. 네슬레의 ‘페린락테'는 성공적이었다. 미숙아는 이 분유를 먹고 아무런 부작용 없이 자랐고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네슬레가 유럽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는 순간이다.

150년 가까운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 위기의 순간은 수시로 찾아왔다. 제 1·2차 세계 대전은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1차 세계 대전은 엄청난 유제품 수요를 만들었고, 네슬레는 미국에 있는 공장을 속속 사들여 전쟁이 끝날 무렵 40여 개의 공장을 갖게 됐다. 기회가 되는 듯 했으나 전쟁이 끝나자마자 소비자들은 신선한 우유를 원하기 시작했고 네슬레는 1921년 첫 번째 손실을 기록했다. 바로 위기가 닥친 것이다.

네슬레는 스위스의 금융전문가인 루이스 데이플을 데려와 공장 가동 효율성을 높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때 사업 다각화를 목적으로 초콜릿 회사 피터 카일러를 사들였다. 이 곳에서 맥아로 된 우유, ‘마일로'라고 불렸던 가루 음료, 유아 음료 등을 개발했고 1938년에는 ‘네스카페'를 출시했다.


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들이 네스카페 전파

2차 세계 대전도 네슬레에게는 위기처럼 보였다. 회사 이익은 반토막 났고 본사가 위치한 스위스는 전쟁 기간 동안 유럽에서 고립됐다.

그러나 전쟁이 네슬레에게 위기로만 끝나지 않았다. 제 2차 세계 대전은 네슬레의 최신 제품이었던 네스카페가 급속도로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추운 전쟁터에서 간편하게 마실 수 있는 뜨거운 네스카페는 언 몸을 녹이는 최고의 음료였고 세계 각지에 주둔하는 미군의 주요 음료가 됐다.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군인들은 본토로 돌아가서도 네슬레의 커피를 즐겼다. 1938년에 1억 달러 수준이었던 총 판매액은 1945년 2억 2,500만 달러까지 급증했다. 네슬레 역사상 2차 세계 대전은 가장 급격히 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분유에서 커피, 화장품 등 사업 다각화
 

네슬레는 전쟁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두 가지 중요한 전략을 세우게 된다. 첫 번째는 M&A를 통한 사업 다각화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초콜릿 회사 피터 카일러를 인수한 것은 분유에서 커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성공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요구르트와 디저트 회사인 프랑스 기업 샴부르시를 인수했고, 1992년에는 생수 회사 페리에, 1998년에는 스필러 패스트푸드를 인수했다. 이런 식으로 네슬레는 생수 회사, 냉동식품 회사, 제약 회사, 화장품 회사를 인수하며 다국적 식품 회사로 성장했다.


UN이 꼽은 세계 최고의 현지화 성공 기업
 

또 하나의 전략은 철저한 글로벌화와 현지화다. 네슬레는 전 세계 80여 개 국가 500여 개 도시에 진출해 있고 종업원 수가 25만 명에 달하는 거대 기업이지만 본사가 위치한 스위스에서의 매출은 2%밖에 되지 않는다. 철저하게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 나가 현지에서 뿌리를 내렸다는 이야기다.

유엔(UN)이 최고의 현지화 기업을 꼽은 적이 있는데, 사람들은 첨단 업종이 되리라고 결과를 예상했지만 1위는 바로 네슬레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문화에 따라 입맛이 현저히 다르기 때문에 식품업체만큼 현지화가 중요한 곳도 없다.

일본이 ‘스시'와 ‘사시미'를 미국에 뿌리내리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를 생각해 보면 식품의 현지화만큼 힘든 것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네슬레는 아주 성공적으로 현지화를 이뤄 냈다. 미국인에게 네슬레가 어느 나라 기업인가 물었을 때 절반 이상이 미국 기업이라고 답변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

한국에서도 철저하게 현지화가 이뤄졌다. 이삼휘 한국네슬레 사장은 입맛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유럽 소비자는 맛은 씁쓸해도 향이 풍부한 커피를 좋아합니다. 반면 한국 소비자는 양립하기 어려운 부드러운 맛과 풍부한 향을 기대합니다. 한국네슬레는 본사의 지시를 최대한 한국 코드에 응용시킵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인의 입맛에 꼭 맞는 ‘테이스터스 초이스'를 내놓게 된 겁니다.”


최근 멜라민 파동도 슬기롭게 넘겨

네슬레는 신뢰도 높은 브랜드를 앞세워 철저한 위기관리 시스템을 갖췄다. 식품 회사는 한 번의 위기가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로 작용하기도 한다. 2004년 이른바 ‘만두 파동' 때문에 한동안 만두 시장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지난해 중국 멜라민 파동도 전 식품 업계를 흔들었다. 특히 커피에 멜라민이 들었다는 소문과 함께 네슬레도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네슬레는 멜라민 파동이 일어나자마자 베이징에 1,200만 달러를 투자해 연구개발(R&D) 센터를 세우고 유해 화학물질을 감지할 수 있는 실험기계를 도입하겠다고 발빠르게 대응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네슬레가 갖고 있는 경영철학과 브랜드다. 네슬레의 로고는 어미새와 아기새 둥지로 이뤄졌는데 이는 안전, 모성애, 자연, 가족 등을 의미한다. ‘전 세계 소비자들에게 최고의 식품을 제공해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인다'는 모토는 다양한 환경정책, 사회공헌 등을 통해 투영되며 브랜드에도 그대로 녹아 들게 관리됐다.

네슬레는 전 세계 경영학 교수들이 선호하는 회사라고 한다. 조직과 인사 관리, 자금 운용, 브랜드 마케팅, M&A, 기업 윤리 등 경영학 수업시간 어디에 등장시켜도 모범사례로 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네슬레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네슬레는 무려 150년 가까이 이어 온 장수기업이다. 장수기업은 ‘반드시'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위기 상황을 맞곤 한다. 네슬레에게 위기 때마다 힘이 되는 것은 바로 창업정신이었다. 죽어가는 유아를 살리자는 공익적 취지는 안전 제일주의 식품 회사로 커 가는 밑바탕이 됐다.

최근 경제전문지 <포브스>에서 앞으로 100년간 장수할 세계 100대 기업을 선정해 발표했다. 스페인의 건설사 ‘악시오나', 프랑스 소비재 기업 ‘아코르' 등이 꼽혔다. 불행히도 한국에서는 단 한 기업도 선정되지 못했다. <포브스>의 잣대를 비판하기에 앞서 한국 기업에는 장수기업의 DNA가 없는 것인지 자성해 볼 필요가 있다. 국내 최고 기업으로서 또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세계를 누비고 있더라도 위기 극복의 DNA가 있느냐의 여부는 다른 이야기다.


- 명순영 / 매경이코노미 기자

출처 : 삼성(www.samsung.co.kr)

2009. 1. 23. 23:59

[위기 극복 기업 10편] 코닝 / ‘깨지지 않는 기업’ 코닝, 경영환경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매출 10%는 R&D 투자

[위기 극복 기업 10편] 코닝 / ‘깨지지 않는 기업’ 코닝, 경영환경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매출 10%는 R&D 투자


2001년, 코닝은 창립 150주년을 맞았다. 본사가 위치한 도시의 시내에서는 성대한 행사가 열렸고 수많은 불꽃이 밤을 수놓았다. 그런데 불과 몇 달 뒤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1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해 육성한 광섬유 사업이 IT(정보기술)버블 붕괴와 함께 막대한 손실을 안겨 줬다. 무려 30억 달러가 허공으로 사라졌고, 110달러를 넘던 주가는 1달러대로 떨어졌다.

당신이 이런 기업에 속해 있다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아마 그 참담한 심경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로 세계적인 장수기업 코닝(Corning)의 이야기다. 다행스럽게도 결론은 해피엔딩(happy ending)이다. 기업사에 남을 만한 실패 사례를 뒤로 한 채 코닝은 우뚝 일어섰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건재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깨지지 않는 그릇' 또는 삼성과의 합작사인 ‘삼성코닝'으로 알려진 코닝, 그 위기의 순간 속으로 들어가 보자.


도시 이름을 딴 글로벌 유리 전문기업

코닝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많다. 1851년에 창립된 158년 역사를 자랑하는 장수기업, 세계 최초로 TV브라운관을 만든 기업. 열을 가해도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개발한 기업, 본사가 위치한 도시 코닝시에서 기업 이름을 딴 기업.

미국 동부 뉴욕시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에 있고 인구 1만 명이 조금 넘는 소도시 코닝시에 바로 코닝 본사가 있다. 코닝은 지역 이름을 따 회사 이름을 지은 세계적인 유리 업체다.

 

발명왕 에디슨도 코닝이 없었다면 지금 모양의 전구를 만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1879년 세계 최초로 필라멘트 백열등을 개발했지만 이를 감싸줄 유리가 문제였다. 에디슨은 코닝에 조수를 보냈고, 팀을 이뤄 연구를 거듭한 끝에 유리거품을 불어 만드는 전구용 유리를 개발해 냈다.

이 일화가 말해 주듯 코닝은 유리에서는 세계 최고다. 일반 유리뿐만 아니라 TV브라운관과 LCD유리기판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1912년에 세계 최초로 선보인 내열 유리 ‘파이렉스'는 지금까지도 그 명성이 자자하다.

그런데 1980년대 초반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달러화 약세와 세계적인 경쟁 속에서 이익이 급감했다. 코닝이 택한 방법은 사업영역의 확대다. 유리에서 생물공학, 광섬유, 세라믹, 화학의료 기구 등 사업을 다각화했다. 그러나 모든 사업이 코닝에게 기회가 되어주지 못했다. 코닝은 선택을 해야 했다.


위기 극복책 1: 핵심 역량이 무엇인지부터 파악

이 때 창업주의 5대손인 제임스 호튼(James Houghton)이 질문을 던졌다. 과연 코닝의 핵심 역량은 무엇인가? 1983년 최고경영자에 오른 그는 핵심 역량을 평가했다. 그것은 유리제조와 관련된 기술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 뒤는 무엇을 가져 가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분명해졌다. 코닝이 처음으로 선보였던 백열전구 진공관 사업과 텔레비전 유리부품 등 무려 5억 달러의 수익을 내던 사업부서를 과감하게 버렸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핵심 역량과 거리가 멀다고 판단해서다.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스스로 경쟁력이 떨어져 성공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한 사업도 접었다. 대표적인 예가 생물공학과 유전공학이었다. 대신 코닝은 유리를 기반으로 한 기술 역량에 따라 특수재료, 소비자 가정용기, 통신산업, 검사서비스를 키우기로 했다. 이른바 코닝의 바퀴모델(Wheel Model)이다.

‘해당 산업의 선두기업으로 오를 수 있는 역량에 집중한다'는 기본 전략을 실천해 코닝은 유리에서 광섬유와 광케이블을 자연스럽게 키웠다.

 


위기 극복책 2: 그칠 줄 모르는 R&D 지원

하지만 광섬유 산업도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 정보기술 버블이 한순간에 꺼지면서 30억 달러라는 손실을 떠안아야 했다. 당장 기업이 살아나려면 비용을 줄여야 했다. 물러났던 제임스 호튼이 복귀했다. 그는 ‘살기 위해 팔을 자른다'는 말과 함께 전 직원의 절반인 2만 5,000명을 내보냈다. 무려 12개가 넘는 공장을 폐쇄했다.

그리고 어느날, 최고기술책임자(CTO)였던 조지프 밀러를 불렀다. 그는 생각했다. “올 것이 왔구나, 연구개발비를 줄이자고 말하겠구나.” 그러나 정반대였다. 호튼은 “연구를 그만둔다면 우리는 미래가 없다”며 “연구개발(R&D)에 몰두해 달라”고 당부했다. 코닝은 2001년 10.3%였던 매출액 대비 R&D 투자비율을 2002년에는 15.3%까지 늘렸다.

코닝은 경영환경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연매출의 10%를 연구개발(R&D)에 투자한다. R&D 투자도 원칙이 있다. 투자액의 70% 가량은 5~10년 안팎에 결과를 볼 수 있는 단기 연구에, 나머지 30% 가량은 10년 이상의 중장기 연구에 투자한다. 당장 구조조정이 있을 수는 있지만 연구개발을 포기하지 않는 전통이 코닝에는 있다.

 

결과는 어떤가? ‘뚝심 있게' 광섬유 분야에 투자하면서 위기를 극복하고 여전히 광섬유의 선도기업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폭발적인 성장은 아니지만 광대역 기술수요가 늘고 있어 코닝의 미래 역할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액정TV용 유리기판 등의 투자도 멈추지 않았기에 현재 50% 넘는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위기국면에서 33억 달러까지 줄었던 매출은 지난해 58억 달러까지 끌어올렸고, 18%대 영업이익률을 올렸을 만큼 탄탄한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기본으로 돌아가자? 과연 기본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져 보자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곧잘 한다. 말하자면 ‘Back to the basic'이다. 그런데 과연 기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성공요건으로서의 기본기(basic)를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최소한 나의 회사가 추구해야 할 기본을 의외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면에서 코닝은 기본을 돌아보는 지혜를 발휘했다. 그 기본은 핵심 기술인 유리에 집중하는 것이었고, 유리에서 파생된 네 가지 분야에만 전념했던 것이다.

 

코닝의 미래는 앞으로도 어둡지 않을 듯하다. 158년 역사에서 묻어나는 관록만으로는 앞으로도 지속가능한 기업을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코닝의 R&D 투자가 미래의 희망인 것이 분명하다.

조지프 밀러 CTO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광섬유 개발에 관한 일화도 소개했다. 1979년 처음 영입됐을 때 “이제 곧 광섬유 시장이 열린다”고 말했더니 경영진들은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1930년대부터 기초개발에 들어가 40년을 기다렸던 경영진들에게 ‘이제 곧'이라는 표현은 그다지 의미있게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닝은 향후 10년 뒤의 시장을 내다보고 경영을 하기 때문에 굳이 ‘이제 곧' 열릴 사업에만 눈독을 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밀러 CTO는 향후 비전 사업을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조명과 3차원(3D) 디스플레이, 후면 광원이 필요한 LCD와는 달리 외부의 빛을 이용해 만드는 리플렉티브(reflective) 디스플레이를 꼽았다.

지금은 많은 기업들에게 위기다. 그래서 구조조정, 파산 등 무시무시한 단어들도 곧장 언론에 오른다. 하지만 당장의 이익만을 고려하면 장수기업이라는 타이틀을 달기 어렵다. 코닝은 이 점을 잘 보여 줬다. 코닝의 최고기술책임자가 언급한 차세대 비전사업은 이미 코닝이 연구를 선도하고 있는 분야로 향후 150년의 역사를 이끌어 갈 원동력이 될 것이다.


- 명순영 / 매경이코노미 기자

출처 : 삼성(www.samsung.co.kr)

2009. 1. 9. 20:09

[위기 극복 기업 9편] 캐논 / 캐논을 카피하라! 캐논에 포커스를 맞춰라! 불황에도 잘 나가는 비결이 캐논에 있다

[위기 극복 기업 9편] 캐논 / 캐논을 카피하라! 캐논에 포커스를 맞춰라! 불황에도 잘 나가는 비결이 캐논에 있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은 거품경제의 붕괴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리는 장기불황을 겪었다. 이 시기에 이른바 일본의 간판기업인 소니, 도시바, 히타치 등이 창사 이래 가장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캐논은 1999년 이후 지속적으로 최고 실적을 경신하며 도요타와 함께 일본의 대표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2003년에는 전기·전자 부문 부동의 1위 소니를 제쳤고, 도요타가 매출에서 하강 곡선을 그릴 때도 캐논은 줄곧 성장세를 이어 왔다.

최근 글로벌 경제 위기가 심각한 가운데 과거 불황을 딛고 최고의 기업으로 도약한 캐논의 전략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일본에서 ‘캐논 배우기 붐'이 불고 있다. 도요타를 제치고 캐논이 ‘벤처마킹 대상 넘버원'이 되는 분위기다. 그 이유는 실적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2007년 기준으로 매출액은 4조 4,800억 엔, 순이익이 4,900억 엔에 달하는데, 2005년부터 3년 연속 일본 기업 중 순이익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도요타가 매출에서 하강 곡선을 그릴 때도 캐논은 줄곧 성장세를 이어 왔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은 거품경제의 붕괴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리는 장기불황을 겪었다. 이 시기에 이른바 일본의 간판기업인 소니, 도시바, 히타치 등이 창사 이래 가장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캐논은 1999년 이후 지속적으로 최고 실적을 경신하며 도요타와 함께 일본의 대표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훗카이도대학 출신의 산부인과 의사였던 창업자가 1945년 소규모 렌즈공장을 사들여 카메라 생산을 시작한 것이 캐논의 시초다. 그리고 캐논은 창사 58년 만인 2003년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웠던 일본 전기·전자 메이커 부동의 1위 기업이었던 소니를 제치고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다.

때문에 최근 글로벌 경제 위기가 심각한 가운데 불황을 벗어난 캐논의 전략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캐논의 부활에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다. 1993년 최고경영자의 자리에 올라 지금까지도 경영 일선에서 뛰고 있는 미타라이 후지오(Fujio Mitarai, 72) 회장이다.


미국식 성과주의와 일본식 종신고용제 접목

미타라이 후지오 회장은 일본 경영계에서는 다소 생소한 개념을 들고 왔다. 미국의 수익중시 경영과 일본의 평생고용제도를 함께 도입한, 이른바 ‘하이브리드(hybrid) 경영'이다.

두 개념을 혼합시킨 배경이 있다. 그는 1970년대 초부터 미국에서 20년 이상 근무했다. 캐논USA 부사장 등을 거치며 일본의 최고경영자로서는 드물게 서구식 경영수업을 오랜 기간 받았다. 1995년 캐논 최고경영자로 부임한 뒤 20년 이상 배워 왔던 미국식 경영방식을 도입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는 미국처럼 수익에 기반한 영업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주주에 대한 이익 환원, 종업원의 생활 안정, 사회에 대한 공헌, 자기자본 축적이라는 미국식 경영이념을 들여왔다. “이 네 가지를 수행하지 못하는 기업은 존재 가치가 없다”고 비판하며 과감하게 기업문화를 바꿨다.

그렇다고 일본식 경영을 배제한 게 아니다. 그는 종업원의 고용을 최우선으로 하며 인력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다. ‘현실에 안주했다', ‘고용 유연성이 부족했다'는 등 비판이 제기됐지만 종신고용제를 고집했다. 복사기 생산라인의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1,200명의 근로자가 필요 없게 됐을 때도 이들을 해고하지 않고 다른 부서로 재배치한 것이 좋은 예다. 그는 “인력을 키우는 데 비용이 많이 든다. 그러니 쉽게 해고하는 것보다는 함께 가는 게 낫다”고 줄곧 말해 왔다.

고용을 최대한 안정시켰지만 성과지향형 인사평가 시스템도 확실하게 운영했다. 엄격한 기준으로 승진과 급여에 철저하게 실적에 따른 차등을 두자, 임금격차가 크게 날 지라도 종업원 사이의 갈등은 없었고 대기업이 겪는 관료주의화도 없었다. 말하자면 ‘실력 종신주의'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는 “기술개발, 회계 투명성 같은 세계 공통의 영역에서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라야 하지만 문화적, 정서적 특성이 필요한 분야에서는 로컬화가 필수”라는 논리로 기업을 이끌어 갔다.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미국 기업에서 효과를 거둔 방식이 한국에서 통한다는 법이 없다”며 “각각의 실정에 맞는 모델을 찾아내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적자 안 나도 경쟁력 없으면 퇴출

고용을 보장하니 직원들이 안정감을 갖고 행복하게 일하게 됐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과감하게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캐논이 위기를 극복한 두 번째 비결은 선택과 집중을 확실하게 했다는 데 있다.

카메라로 시작한 캐논은 복사기에 이어 1990년대 반도체 제조장치 사업까지 확장했다. 하지만 일본의 장기 불황기에 주종인 카메라는 물론 다른 사업부문도 경쟁에 시달렸다. 적자를 기록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미타라이 후지오 회장은 ‘세계 제일의 사업만을 모은 기업을 만들자'고 결단을 내렸다. 그리곤 취임 3년째인 1997년부터 PC사업, 액정표시장치(LCD) 등에서 손을 떼면서 철저하게 사업영역을 조정했다.

“PC는 중앙처리장치(CPU) 싸움인데 우리처럼 CPU를 조달해 쓰는 회사에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핵심부품과 핵심기술 없이는 제조업에서 이기기 어렵다. 캐논이 카메라 사업이 강한 것은 렌즈공학에서 기술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업 구조조정에 대한 철학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1995년부터 캐논이 손을 뗀 사업만 일곱 건에 달한다. 하지만 장래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투자를 포기하지 않는다. 컴퓨터 프린터용 버블젯 기술은 개발까지 10년이 걸렸지만 일본 내 시장 점유율 수위를 다툴 만큼 성장했다. 그 결과 사무기기 부분이 총 매출의 70% 이상을 차지하게 만들었고 디지털카메라는 세계 1위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을 중시하는 문화 자리잡아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을 중시하는 사풍도 캐논의 장점이다. 캐논은 벤처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단순한 기술개발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봤다. 경쟁사보다 지식재산에서 우위에 서야 한다는 판단 아래 1970년대부터 ‘특허법무본부'를 설립했다. 1989년 ‘지적재산 법무본부'로 이름을 바꾼 뒤 현재 40여 명 규모로 사장 직할 독립부서로 운영 중이다.

미타라이 후지오 회장이 최고경영자에 오르면서 이런 문화는 한층 더 강화됐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연구자들에게 학술 논문보다 특허 명세서를 많이 읽고, 논문보다 특허를 더 많이 생산하도록 격려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앞으로 특허가 강한 몇몇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지적재산권 시대에 대비하는 것이다.”

캐논은 지적재산을 ‘사업적인 관점에서 창출되고 차별화된 지혜 전부'라고 정의해 신기술 개발에서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독자적인 물류기법까지 경영의 모든 것을 지식재산으로 취급했다. 지적재산 법무본부에 소속된 인재를 각 사업본부에 배치하고, 지적재산 관련 자격증까지 따도록 독려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캐논은 일본에서는 마쓰시타전기에 이어 2위의 특허 보유 기업이 되었다. 매년 특허 건수가 3,000건을 넘어서고 있다. 미국에서 등록된 특허 건수를 보면 IBM과 마쓰시타전기에 이어 3위를 달려, HP와 마이크로소프트마저 따돌렸다.

독자기술을 중시하는 문화는 연구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연구개발비는 지난 1995년 이래 증가 일로다. 1995년 1,700억 엔대였던 개발비는 지난해 3,600억 엔 정도까지 뛰어올랐다.


공장 자동화 총력

마지막으로 캐논의 셀(cell, 세포) 방식의 생산현장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 이바라키현 아미지역에 위치한 복사기 생산공장에는 컨베이어 라인이 없다. 7~8명의 근로자가 U자형 작업대에서 복사기를 조립한다. 이른바 셀 방식 생산이다. 이 방식의 장점은 유연하다는 것. 예를 들어 300대만 생산하려는 복사기 A모델을 위해 컨베이어를 따로 만들 필요는 없다. 셀을 늘려 생산량을 맞추면 그만이다. 컨베이어 방식은 앞 공정이 늦어지면 뒷 공정도 늦어지지만 셀 방식에서는 이럴 염려가 없다.

이 셀 방식의 도입으로 도쿄돔 18개에 해당하는 공장 바닥면적을 절약했고, 3,000억 엔 이상의 재고비용을 절감하는 등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미타라이 후지오 회장은 셀 방식을 넘어 ‘공장 완전 자동화'에 주력했다. 전기가 꺼진 상태에서도 제품이 생산되는 공장을 만들라는 주문이다. 공장 무인화가 이뤄지면 중국 등 인건비가 싼 곳으로 공장을 이전할 필요도 없고 불황이 와도 직원 수를 줄일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다.

2009년에도 글로벌 경제위기는 계속될 것 같다. 장기불황의 조짐마저 보인다. 그렇다고 움츠려 있을 수만도 없다.

자동차 경주를 생각해 보자. 대부분의 경기에서 승부는 직선코스보다 곡선 주로에서 결정됐다. 진정 강한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코너를 돌 때 승부를 걸어야 하는 법이다. 지금이 위기라고 모두들 얘기하지만 위기 속에 기회가 있는 것도 분명하다.


- 명순영 / 매경이코노미 기자
2008. 12. 19. 00:26

[위기 극복 기업 8편] 맥도날드 / 반미 상징에서 친근한 로컬 기업으로 현지화에 성공

[위기 극복 기업 8편] 맥도날드 / 반미 상징에서 친근한 로컬 기업으로 현지화에 성공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타국에서 혼자서 한끼 식사를 해결해야 될 때, 거리에서 맥도날드를 발견하고 반가워 했던 기억이 한두 번쯤은 있을 것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만날 수 있는 맥도날드. 요즘 불황의 여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장 호황을 누리는 기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맥도날드는 한때 미국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정크푸드의 대명사로 불리우며 매출 급감으로 인한 위기에 빠졌다.

경영진은 방만했던 확장경영 방식을 버리고, 직원들의 역량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 현지화를 보다 철저하게 점검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불황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월 매출이 지난해와 비교해 8% 포인트 늘었다. 맥도날드의 위기 극복 사례는 우리에게 소비자의 눈으로 판단하려는 원칙이 유지된다면 못 넘길 위기란 없다는 교훈을 안겨 준다.


요즘 커피전문점 스타벅스가 시쳇말로 ‘죽을 쑤고 있다'고 한다. 경기불황으로 소비자들이 5달러가 넘는 커피를 잘 마시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 스타벅스 매장을 돌아보면 한국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반면 맥도날드는 호황이다. 글로벌 시장 기준으로 따져 봤을 때 10월 매출이 지난해와 비교해 8% 포인트 늘었다. 짐 스키너 맥도날드 최고경영자도 “불황기에도 불구하고 잘 견디고 있다”고 흡족함을 나타낼 정도다. 이러한 매출 증가는 불황의 여파로 소비자들이 외식을 줄이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저렴한 대체식을 많이 찾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955년에 세워진 맥도날드는 미국 문화를 상징하는 코드다. 세계 어디를 가도 특유의 노란 골든 아치 엠(M모양의 로고)을 만날 수 있을 만큼 글로벌화에도 성공했다. 세계적인 브랜드 컨설팅그룹 인터브랜드에 따르면 맥도날드의 브랜드는 310억 5,000만 달러(2008년 기준)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50여 년 동안 맥도날드에 닥친 위기는 호락호락한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2000년 이후엔 그 고초가 심했다. 반미 시위가 거세졌을 때도 맥도날드는 타깃이 되었다. 대표적인 비만 식품을 꼽을 때도 맥도날드는 빠지지 않는다. 과연 맥도날드는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며 오늘날의 브랜드 가치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맥도날드의 탄생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짚어 보자.


1950년대 단순한 메뉴와 공정으로 대인기

맥도날드의 창업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리처드 맥도날드, 모리스 맥도날드 형제다. 이들 두 형제는 1940년대 캘리포니아주 샌버너디노에서 식당을 운영했다. 당시 캘리포니아에서는 자동차 운전자를 상대로 하는 식당이 유행했다. 맥도날드 형제도 이 대열에 합류해 햄버거를 팔았다. 그런데 맥도날드 형제의 가게는 좀 달랐다. 종업원들이 배달하는 방식을 없애고 주방과 고객 사이에 두 개의 창문을 내 고객이 직접 음식을 주문하게 했다. 15센트짜리 햄버거는 언제나 똑같은 방식, 즉 겨자와 케첩, 양파에 피클 두 조각을 곁들인 단순한 형태였다. 지금의 ‘드라이브 인(Drive In)' 식당과 흡사했다.

하마터면 캘리포니아의 인기 있는 작은 식당에 머무를 뻔 했던 맥도날드를 미국 전역으로 퍼뜨린 인물은 레이 크록이었다. 믹서를 판매하던 그는 이 식당 운영 방식이 미국 전역에 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1954년 맥도날드 형제와 계약을 맺고 프랜차이즈 권리를 얻어냈다. 그렇다면 햄버거 이름이 ‘크록'이 아닌 ‘맥도날드'인 이유는 무엇일까? 훗날 크록은 “크록이라는 이름은 도무지 느낌이 나지 않아 맥도날드라는 이름을 고수했다”고 밝혔다.

크록이 전권을 갖고 운영을 시작하면서 사업은 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1955년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한 뒤 10년이 되지 않아 10억 개가 넘는 햄버거를 팔았고, 점포 수는 1,000개를 돌파했다. 1984년 크록이 죽을 무렵에는 유럽, 호주 등 전 세계에 맥도날드 점포가 7,500개를 넘었다.

맥도날드는 말 그대로 전 세계로 진출했다. 도무지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 같은 국가, 도시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예를 들어 1994년 쿠웨이트 시티에 문을 열었을 때 맥도날드에 들어서려는 차들이 7마일이나 늘어서는 장관을 이뤘고, 하루에 1만 5,000명이 몰려들어 북새통이었다. 옛 소련이었던 러시아가 개방되자마자 맥도날드는 모스크바로 곧장 진출했다. 이런 적극적인 글로벌화 덕분에 ‘미국 정보원들이 뚫지 못하면 맥도날드 영업사원을 보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맥도날드가 성공한 데는 현지화 전략의 공이 컸다. ‘적어도 음식은 각 지역의 고유한 맛을 살려야 한다'는 게 맥도날드의 기본 전략. 고객들에게 최대한 굽히고 비위를 맞추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공습 이후 반미 시위가 한창이던 2001년, 인도네시아 맥도날드 직원들은 이슬람교도 전통 복장을 입고 손님을 맞았다. 남자 직원은 ‘페치'라는 전통모자를 쓰고 여직원은 머리에 숄을 걸쳤다. 그 결과, 자카르타에 있는 맥도날드 체인점들은 단 한 번도 시위대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반미 시위의 타깃, 정크푸드 이미지로 곤혹

하지만 맥도날드는 숱한 위기를 겪었다. 2000년대 들어 매출 하락 폭이 커졌다. 무엇보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를 일컫는 말)와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각인된 점이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맥도날드는 전 세계에서 반미 시위만 벌어졌다 하면 시위대로부터 습격당하거나 폭파당한다. 2002년 한국에서 반미 시위가 심했을 때 한국맥도날드 본사가 있는 서울 인사동 관훈 매장 앞은 반미 구호로 넘쳐 났다. 매출이 급감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또 웰빙을 추구하는 문화가 생겨나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햄버거를 ‘건강에 해로운 식품'의 상징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각종 인공 조미료와 성분도 불확실한 고기로 만든 햄버거는 비만의 주범으로 인식됐다. 2002년에는 뉴욕의 청소년들에게 비만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서는 수모를 당했다. 2004년에는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으며 체중 증가량을 잰 다큐멘터리 영화 <슈퍼 사이즈 미>로 곤혹을 치뤘다. 사람들 기호도 변하기 시작했다. 맥킨지 보고서는 소비자들이 거실처럼 안락한 분위기에서 즐길 수 있는 슬로우 푸드(Slow Food)를 원하지, 햄버거 매장의 딱딱하고 불편한 의자에서 급하게 식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2002년 4분기, 1965년 상장회사로 등록한 이후 37년 만에 처음으로 분기 손실을 기록했다. 이 소식과 함께 2003년 맥도날드 주가는 대폭락했다.


고객 눈높이를 맞추자' 현지화 재점검 돌입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구원투수로 등장한 이는 제임스 칸탈루포다. 실적이 나빠지자 잭 그린버그 회장이 사임하고, 전임 사장이던 칸탈루포가 돌아왔다. 그는 위기의 원인을 하나하나 파악하고 해법을 찾아냈다. 우선 점포 정리 등 방만했던 확장 경영 방식을 버렸다. 당장은 경비절감이 필요해서다. 10개국 175개 해외 매장을 폐쇄하고, 일부 국가에서는 완전히 철수했다.

또 직원들의 역량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 위기 뒤 바로 ‘승리계획(Plan to win)'이라는 것을 발표했는데, 직원들에 대한 교육 투자를 늘리겠다는 게 골자였다. 구조조정과 함께 투자도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대부분의 전망을 뒤엎는 역발상을 도입했다. 맥도날드 사내 대학인 ‘햄버거 대학'에 투자를 늘려 ‘장기전'에 대비했다. 칸탈루포의 처방은 금방 효과가 나타나 1년 만에 매출은 다시 늘었다. 그러나 그는 복귀 1년만인 2004년 심장마비로 돌연사했다.

 

그 뒤 호주 오스트레일리아 태생으로 맥도날드 아르바이트생 출신인 찰리 벨이 들어왔다. 그는 현지화를 보다 철저하게 점검했다. 쇠고기를 먹지 않는 인도에서는 채소 햄버거를 내놓았고, 맥주의 나라 독일에서는 세계 최초로 매장 내에서 맥주를 팔았다. 노르웨이에서는 북해산 연어를 이용한 연어 샌드위치를 만들어 판매했고, 한국에서는 전통 음식 김치버거와 불고기버거를 내놓았다.

슬로우 푸드가 유행한다는 점도 인정하고 매장 분위기를 바꿨다. 한국 맥도날드도 딱딱한 의자 대신 푹신한 소파를 내놓으면서, 향기로운 커피와 함께 햄버거를 느긋하게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고칼로리 비만식품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칼로리를 줄인 햄버거를 개발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육류가 아닌 두부를 넣은 이른바 ‘일본형' 햄버거도 내놓았다. 샐러드나 달걀 같은 건강 메뉴도 추가했고, 유럽과 미국에서는 10여 가지 샌드위치 메뉴를 도입해 주문 즉시 그릴로 구워 줬다.

소비자의 신뢰를 되찾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매장마다 ‘이동선'을 그어 놓고 직원들이 30분씩 전자감응기를 들고 화장실 청결 상태에서 냉장고 온도까지 꼼꼼하게 체크하도록 했다. 점검 태도가 불성실하면 전자감응기가 매니저의 휴대폰으로 이를 알린다. 고객들에게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취지임에는 말할 필요도 없다.

신상품 발굴 노력이 빛을 발해 맥도날드 커피는 일약 히트를 쳤다. 최근엔 ‘맥도날드에 햄버거를 먹으러 가는 게 아니라 커피를 먹으러 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을 정도다. 물론 앞으로 맥도날드가 순탄한 길만을 걸을 것 같지는 않다. 햄버거는 여전히 정크푸드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또 일회용품이 환경을 파괴한다며 환경보호주의자들의 비난도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위기를 극복할 때처럼 현지 소비자의 눈으로 판단하려는 원칙이 유지된다면 못 넘길 위기란 없어 보인다. ‘Think Globally, Act Locally(생각은 글로벌하게, 행동은 지역 현실에 맞게)'라는 맥도날드의 모토에 그 답이 있는 것 같다.


- 명순영 / 매경이코노미 기자

2008. 12. 17. 20:12

[2009년 국내외 경제 전망 2편] 세계 경제 / 국제 경제 공조로 금융위기 여진 극복에 힘쓰는 한 해

[2009년 국내외 경제 전망 2편] 세계 경제 / 국제 경제 공조로 금융위기 여진 극복에 힘쓰는 한 해


2009년 새해를 앞두고 세계 경제계는 암울한 전망을 쏟아 내고 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여파가 일파만파 번지면서 2008년 세계 금융시장은 혼란에 빠졌다. 금리 인하와 유동성 확대 등 적극적인 정책 대응으로 위기의 정점은 한풀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기의 여진과 뒤이은 실물경기 침체는 2009년 한 해 동안 전 세계 경제를 무겁게 짓누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 중국 등이 국제 공조를 통해 과감한 경기부양책과 금리 인하에 나서고 있어 극단적인 위기 상황이 전개되지는 않을 전망이다.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 전이되면서 경기침체 본격화

세계 경제는 2007년까지 ‘고성장-저물가'의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2008년 들어 고유가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의 급등으로 저물가 기조가 깨지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성장세마저 급격히 둔화되었다. 이로 인해 2008년 세계 경제 성장률은 지난해의 3.7%에서 2.7%로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2009년 세계 경제는 금융위기와 경기침체가 지배하는 암울한 한 해가 될 전망이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시작된 금융위기는 2008년 그 강도를 더해 가면서 세계 금융시장을 극도의 혼란 상태로 몰아넣었다. 금리 인하와 유동성 확대 등 적극적인 정책 대응으로 금융위기의 정점은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금융위기의 여진과 뒤이은 실물경기 침체는 2009년 한 해 동안 전 세계 경제를 무겁게 짓누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주요 선진 경제권이 대부분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며, 신흥개도국의 경우 금융위기와 선진국 경기 하락의 영향이 본격화되면서 성장 모멘텀이 크게 약화될 것이다.

이에 따라 2009년 세계 경제는 IT 버블 붕괴 시보다 낮은 1.3% 성장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일부 기관과 투자은행들은 침체의 골이 더욱 깊어져 세계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 중국 등 주요국 정부가 국제 공조를 통해 과감한 경기부양책을 추진하고 있고 금리 인하에 나서고 있어 극단적인 위기 상황이 예상되지는 않는다.

 


정부의 역할이 중시되는 국가자본주의가 득세

내년에도 글로벌 유동성이 축소되면서 금융시장의 축소와 불안이 이어지는 가운데 신흥시장으로의 자금 유입은 감소될 것으로 보인다. 과거 저금리 시대에 레버리지(Leverage)를 활용하여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 자산의 버블을 형성하고 신흥시장으로의 자금 유입에 크게 기여했던 선진국의 대형 금융기관들이 반대로 레버리지 축소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2009년에는 선진국에 이어 신흥시장에서도 자산 디플레이션이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금융위기 극복과 경기부양을 위해 국가의 시장 개입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어림잡아 내년 한 해 동안 약 6조 5,000억 달러 이상의 국가 예산이 주요국 정부에 의해 투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시장 기능이 약화되면서 국가의 역할이 커지는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가 한동안 득세할 것을 의미한다.

이와 더불어 그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 규제 완화와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중요한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주요국들은 금융시스템 안정을 위해 은행 등 금융기관의 국유화 조치를 지속하고 경기부양책을 시행하는 한편,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도 강화할 방침이다.

특히 2008년 미국 선거는 세계 경제 변화에 촉매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오바마와 민주당이 승리함에 따라 정부의 시장개입이 증가하면서 소위 ‘국가의 귀환'을 촉진할 것이다. 이는 구제금융이나 경기부양 외에도 금융시장 개혁, 의료보험 확대 등 구조적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민주당과 오바마는 자유무역으로 인해 미국의 일자리가 줄어들었다고 비판하고 있어 FTA 협상은 지연되고 통상 마찰이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하개발어젠다(DDA : Doha Development Agenda) 협상이 결렬되어 새로운 다자 간 통상질서의 수립이 지연되는 가운데 세계 경기의 둔화는 통상질서의 혼란과 함께 세계 교역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이로 인해 실물경기 침체의 영향을 받아 M&A나 그린필드형 투자(새로운 기업을 세우거나 기존 설비를 늘리는 투자) 등 글로벌 기업 활동도 부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외교안보정책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기반한 민주당의 전통적 정책기조에 따라 다자주의로 전환되겠지만 미국의 국익을 위한 일방주의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신흥국 위기 발생 가능성 경계해야

그동안 미국과 더불어 세계 경제의 성장 엔진 역할을 해 왔던 중국 경제는 2009년에 감속 성장에 진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세계 경제 불황으로 수출이 위축될 것이고, 이는 지난 수년간 중국의 고도성장을 이끌어 왔던 과잉 투자의 조정을 더욱 심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중국 정부는 8% 성장률을 고수하기 위해 앞으로 2년간 4조 위안에 이르는 엄청난 자금을 투자하여 내수 부양에 나설 전망이다.

신흥국들은 선진국 자본의 이탈로 주가와 통화가치가 급락하는 등 국가부도 위기를 맞고 있으며, 아이슬란드, 헝가리, 우크라이나, 파키스탄 등은 이미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내년에도 글로벌 신용경색으로 인해 신흥국의 리스크는 여전히 높을 것으로 보인다.

신흥시장 중 동유럽 지역이 금융위기에 가장 취약할 것으로 평가되며, 금융 불안은 신흥시장의 실물경기 침체로 이어져 선진국 경제 회복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는 미국발 금융위기가 유럽과 일본 등 선진국을 거쳐 신흥국으로 전이됨으로써 결국 세계 경제에 또 다른 충격을 가하는 부메랑으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2008년 들어 높은 상승세를 보이던 국제 원자재 가격은 2008년 7월 이후 급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는 실물경기 둔화로 인한 수요 감소와 투기 자금 이탈이 주된 원인이다. 2009년에도 세계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서 유가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의 하향 안정화 추세는 지속될 전망이다.


국제 금융체제 개혁을 둘러싼 논의는 난항 예상

미국발 금융위기가 선진국과 신흥시장을 포괄하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확대되면서 세계적 차원의 공조와 개혁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논의는 기존의 G7이 아닌 G20에서 주로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주요국의 협력과 향후 금융시스템의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개혁이 주된 논의 대상이 될 전망이다.

하지만 국제 금융질서의 재편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유럽이나 중국, 러시아 등의 요구에 맞서 미국은 기존 지배력의 유지를 위해 노력할 것이므로 혁신적인 변화를 도출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김득갑 /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2008. 12. 16. 01:50

[위기 극복 기업 7편] 월트 디즈니 / 창의성 잃었을 때 회사도 위태, 디즈니의 ‘창의성 회복’ 작전

[위기 극복 기업 7편] 월트 디즈니 / 창의성 잃었을 때 회사도 위태, 디즈니의 ‘창의성 회복’ 작전

창의성이 생명인 곳에서 창의성이 사라지면 무엇이 남을까? 실적은 곤두박질치고, 조직은 위태로워진다. 상상과 공상의 나라 디즈니, 가장 창의적인 곳이 되어야 할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창의성을 잃어버리자 기다렸다는 듯 위기가 찾아왔다.

두 번의 위기를 맞았을 때 디즈니는 마이클 아이즈너와 로버트 아이거의 뛰어난 리더십으로 힘겨운 고비를 넘겼다. 낡은 리더십이 시대에 맞는 리더십으로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그 두 번의 위기를 이긴 핵심은 바로 ‘창의성 회복'이다.


국내 캐릭터 상품의 시장 규모가 연간 4조 원대라고 한다. 그런데 월트 디즈니가 만든 캐릭터 상품 하나가 연 6조 원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바로 ‘미키마우스'다. 미키마우스의 상품성은 현대자동차의 대표 차종인 ‘그랜저'를 30만 대 수출한 것과 같은 경제효과를 갖고 있다.

미키마우스의 위상은 대단하다. 초등학생들에게 ‘어떤 그림이 그려 있는 상품을 좋아하느냐'고 물어 보면 반드시 나오는 대답이 미키마우스다. 여기에 ‘도날드 덕', ‘구피' 등 디즈니가 만든 어린이들의 친구들이 꽤 많다. 이 뿐인가? 미국은 물론 세계 각국 어린이들에게 “엄마, 아빠와 어디로 놀러 가고 싶으냐”고 물어 보면 주저 없이 ‘디즈니랜드'라고 대답한다.

1928년 만화제작자 월트 디즈니가 세운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은 종합 엔터테인먼트 그룹으로 변신하며 80년이 지난 오늘날 세계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많은 글로벌 기업이 그러하듯 디즈니도 위기 국면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위기가 찾아온 결정적인 이유는 가장 창의적인 곳이 되어야 할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그 창의성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대주주와 전문경영인과의 불화도 새로운 어려움을 낳았다. 과연 디즈니는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을까?

 


마이클 아이즈너, ‘공쇼'로 직원들의 숨겨진 창의성 끌어내

디즈니는 두 번의 큰 위기를 맞았다. 첫 번째는 창업주 월트 디즈니가 사망한 후에 찾아왔다. 1966년 탁월한 능력과 절대적인 카리스마로 기업을 이끌었던 월트 디즈니가 사망한 뒤 후계자들이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의사결정력이 떨어지면서 창의적인 사업 대신 테마파크를 중심으로 한 부동산 운용에 치중했다.

부실경영의 여파는 1980년대 초반에 찾아왔다. CBS가 1954년부터 방송해 오던 디즈니 방송을 끊으면서 텔레비전과의 인연이 사라졌고, 당시 인기를 끌었던 <스타워즈>에 완전히 밀려났다. 디즈니는 미국 중년의 사라져 가는 브랜드로 인식됐다.

1979년 시장점유율은 4%로 7개 대형 영화제작사 중 꼴찌로 전락했다. 1980년 1억 5,000만 달러에 달하던 이익이 1983년에는 9,000만 달러대로 하향곡선을 그렸고, 미국 캘리포니아와 플로리다에 있는 놀이공원 입장객 수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증권가에선 ‘월트 디즈니가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파다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한 최고경영자(CEO)가 마이클 아이즈너 회장이다. 파라마운트사에서 전격 영입된 아이즈너 회장이 디즈니를 구한 비법은 한마디로 요약된다. 바로 ‘창의성 회복'이다. 그는 디즈니에 영입되자마자 비전부터 다시 세웠다. 5년의 장기 계획을 세워 매년 열두 편의 영화와 한 편의 만화영화를 만들겠다는 것.

그 뒤 창의성을 살리기 위해 ‘공쇼(Gong Show)'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공쇼는 1970년대 유행한 미국의 TV 쇼 이름. 아마추어들이 자유롭게 춤이나 노래 실력을 겨루는 무대였다. 이를 본떠 모든 직원들이 애니메이션에 대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발표하도록 했다. 모든 임직원들이 1년에 세 번의 공쇼에 참여하도록 유도해 늘어진 조직문화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숨어 있던 직원들의 창조성을 되살렸던 것이다.

또 본업에 충실했다. 영화와 테마파크에 몰두한 것이다. 특히 영화산업에 매진했는데 한 영화의 성공이 엄청난 수익을 낸다는 점에서, 5년 주기로 극장에서 재개봉하던 기존의 영화 전략을 폐기하고 새로운 영화 개발에 전력을 쏟았다.

 

그는 미키마우스로 상징되는 디즈니의 브랜드 파워를 살리기 위해 캐릭터 사업을 추진했다. 아이즈너 회장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 등 히트 작품을 잇따라 내놓을 수 있었다. 그가 위기 극복에 매진하는 동안 1984년부터 1997년까지 이익은 16억 달러에서 220억 달러로 눈에 띄게 증가했다. 시가총액도 20억 달러에서 670억 달러로 껑충 끌어올렸다.


후임 로버트 아이거, 제작자 아이디어 최대한 존중

그런데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이번엔 아이즈너 회장 자신이 위기를 자초했다. 아이러니하게도 20년 이상 재직하는 동안 그토록 강조했던 창의적인 조직을 스스로 무너뜨린 것이다. 그는 독재자처럼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했다. 디즈니의 모든 영화와 드라마 작품을 직접 선택했고, 심지어 디즈니 건물의 커튼 색깔까지 자신이 고를 정도로 지나친 개입이 계속되자 눈총을 받았다. 결국 아이즈너 회장은 내부 직원들의 반발과 경영진과의 다툼으로 인해 주주들의 신뢰를 잃고 2005년 사임했다.

다행스럽게도 후임자인 로버트 아이거 최고경영자(CEO)가 다시 한 번 창의성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ABC방송 기상캐스터에서 출발해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그는 아이즈너 밑에서 일할 때 그의 문제점을 잘 알았고, 전제통치의 대명사로 불렸던 전략기획그룹을 해체했다. 아이즈너 회장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매사 뒤편에 서서 사람들을 독려했고, 말을 아끼고 주변의 말을 경청했다. 또한 제작자들의 아이디어를 최대한 존중해 사업을 추진했다.

그의 리더십으로 인해 창의적인 회사 분위기를 해치는 관료적 경영이 점차 사라졌다. 테마파크, 리조트, 스튜디오 등 각 사업부 단위는 스스로 권한을 갖고 책임 있게 일하게 됐다. 톰 스택스 월트 디즈니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로버트 아이거는 신중한 자유방임형 스타일로 임직원의 잃어버린 창의성과 조화를 다시 이끌어 냈다”고 평가했다.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디즈니 영화 프로덕션 파트너사인 픽사 애니메이션과의 관계를 회복시켰고, 나아가 2006년 1월 스티브 잡스 애플 CEO로부터 픽사 지분을 모두 인수해 애니메이션 분야의 위상을 굳건히 다졌다. 아이거 회장이 아니었더라면 사무실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다닐 정도로 자유분방하고 재기 발랄한 픽사 직원들이 월트 디즈니의 압력에 눌려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주변의 평가이기도 하다.

아이거 회장이 경영을 맡은 뒤 실적은 다시 상향세로 돌아섰다. 월트 디즈니의 2007 회계년도(2006년 10월~2007년 9월) 순이익은 전년보다 30% 가까이 늘어나 그가 부임한 2005년 회계연도 이후 3년 연속 두자릿수 성장을 이어갔다. 이러한 성장은 그가 창의력 양성에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마케팅 목표 계층을 기존 유아 중심에서 10~20대, 나아가 중·장년층으로 확대시킨 것이 주효했다. 예를 들어 2006년 디즈니 채널에서 방영돼 10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TV 영화 <하이스쿨 뮤지컬>을 실제 뮤지컬과 콘서트, 아이스쇼 등으로 새롭게 각색해 총 1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경영 컨설턴트 짐 콜린스는 방대한 양의 실증 조사를 통해 ‘단기간에 성장한 기업들은 오래 유지되기 어렵지만, 위대한 기업들은 대부분 수십 년간 꾸준히 성장하고 전환점을 거쳐 도약한다'고 했다. 그 전환점이란 바로 ‘위기와 극복의 모멘텀'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디즈니는 두 번의 위기를 맞아 마이클 아이즈너와 로버트 아이거라는 다소 다르지만 뛰어난 리더의 리더십으로 힘겨운 고비를 넘겼다. 낡은 리더십이 시대에 맞는 리더십으로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위기를 극복한 경우이다.


- 명순영 / 매경이코노미 기자

출처 : 삼성(www.samsung.co.kr)
2008. 12. 16. 01:48

[위기 극복 기업 6편] 한 번도 안 해봤으니 이제 해보자! 아사히맥주 / 맥주 모르는 은행원 사장, 역발상으로 위기 타개의 해법을 찾다

[위기 극복 기업 6편] 한 번도 안 해봤으니 이제 해보자! 아사히맥주 / 맥주 모르는 은행원 사장, 역발상으로 위기 타개의 해법을 찾다

1953년 당시 33.5%로 업계 1위였던 아사히맥주의 시장점유율은 1985년에는 한자리 수인 9.6%로 떨어졌다. 아침해를 뜻하는 아사히(朝日)가 거듭된 실적 악화로 저무는 해를 뜻하는 ‘유우히(夕日) 맥주'라고 불릴 때 구원투수로 등판한 사람이 히구치 히로타로 사장이었다.

은행원 출신의 히구치 사장은 맥주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잘 모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또 새로운 시각으로 현재와 미래를 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는 임직원 의식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개혁을 시작했다. “전례가 없으니까 안 한다가 아니라, 전례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요구했다.


많은 사람들이 맥주를 가장 잘 만들고, 또 즐기는 국가로 독일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일본인들은 섭섭해 할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선술집에 가면 ‘とりあえず, なま! (도리아에즈, 나마!: 생맥주 먼저!)'라는 얘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일본인들은 전통 술인 사케(청주)를 더 즐기지 않을까 생각하겠지만 사케를 마시기 전에 맥주로 먼저 목을 축인다. 점심시간에 혼자 맥주를 마시는 직장인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만큼 맥주가 생활 속에 녹아들었다는 얘기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의 맥주 생산 역사는 깊고, 그만큼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하다. 일본 맥주 시장의 경쟁 구도를 두고 2강 2중이라고 한다. 아사히와 기린이 40%에 약간 못 미치는 시장점유율로 1, 2위를 다투고, 그 뒤를 삿포로와 산토리가 10% 조금 웃도는 점유율로 3~4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맥주시장에서 주목할 기업은 바로 아사히맥주다. 아사히맥주가 1위로 등극한 것은 2001년으로 전쟁 이후 50년 가까이 절대강자로 군림했던 기린은 장기 집권에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렇다고 아사히맥주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순탄하게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린 것은 아니다. 아사히맥주는 1985년 시장점유율이 10% 이하로 떨어지면서 부도의 순간까지 내몰렸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고 1위 다툼을 할 만큼 경쟁력을 끌어올린 원동력은 무엇일까?

 

아사히맥주 히구치 히로타로 사장의 위기 타개법

1. ‘전례가 없으니까 한다'는 역발상을 시도하라.
2. 젊은 사원들의 의견을 귀담아 듣는다.
3. 영업소를 소비자 불만을 모으는 창구로 만들어라.
4. 소비자가 제품을 만든다는 점을 기억하라.


은행원 출신 사장 “발상을 바꾸다”

1986년 일본은 소주 열풍이 휘감고 있을 때다. 맥주업계의 성장세는 뚝 떨어졌다. “맥주업계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산업”이라는 자조적인 얘기까지 나왔다. 아사히맥주는 그 와중에 더 힘겨운 때를 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사히맥주를 두고, ‘유우히(夕日) 맥주'라고 했다. 아사히란 말이 원래 아침해(朝日)라는 뜻인데, 거듭된 실적 악화를 비꼬아 ‘저무는 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1953년 당시 33.5%로 업계 1위였던 시장점유율이 1965년 23.2%, 1975년 13.5%, 1985년에는 한자리 수인 9.6%로 떨어졌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판한 사람이 히구치 히로타로(Higuchi Hirotaro) 사장이었다. 1986년 스미토모 은행에서 영입된 히구치 사장이 본 아사히맥주의 첫 인상은 ‘패배' 그 자체였다.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안 된다. 영업비가 제공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전례가 없어서 안 한다' 등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 직원들은 ‘당장 망해도 이상할 게 없지'라고 자조하며 패배의식에 젖어 있었다. 이를 바꾸지 않으면 아사히맥주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히구치 사장은 맥주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잘 모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또 새로운 시각으로 현재와 미래를 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는 임직원 의식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개혁을 시작했다.

“전례가 없으니까 안 한다가 아니라, 전례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요구했다.

히구치 사장 스스로가 먼저 전례에 없던 일을 했다. 경쟁업체인 기린과 삿포로를 찾아가 ‘아사히맥주의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약간은 당황했던 경쟁업체 회장들은 두 가지를 지적했다. 요약하면 ‘맥주를 만들 때 좋은 원료를 사용하고, 오래된 맥주를 고객들 앞에서 없애라'는 것.

따끔했지만 값진 충고였다. 그는 맥주업계 대선배의 조언에 따라 아사히맥주의 사내 지침으로 네 가지 원칙을 수립했다. 이 원칙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 맛있는 맥주를 만들기 위해 돈을 아끼지 말고 세계에서
    가장 좋은 품질의 원재료를 사용한다.
2. 다른 업체를 흉내내지 않는다.
3. 건강을 지향한다.
4. 고객이 늘 신선한 제품을 마실 수 있게 제조일로부터
     3개월이 지난 맥주는 전국 어디에 있든지 회수한다.

그는 이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오래된 맥주를 회수하는 데 당시 12억 엔이라는 큰 돈이 들었지만 돈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와 자부심이었다. 직원들에게 오래된 맥주를 시음시켰더니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히구치 사장은 말했다.

“당신들이 먹기에도 맛없는 맥주를 소비자에게 팔 수 있겠는가? 이런 맥주를 파는 게 부끄럽지 않은가? 앞으로 우리 아사히는 신선한 맥주만을 공급함을 소비자에게 알리자.”

이러한 결단은 직원들의 자부심을 높였고, 아사히맥주를 부활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는 또 “모든 책임은 사장 한 사람이 질 뿐, 영업사원은 현장에서 판매에만, 기술자는 공장에서 신기술 개발 매진에만 힘쓰면 된다”고 독려했다.


영업소를 소비자 불만 수집 창구로 바꿔

아사히맥주가 결정적으로 재기할 수 있었던 계기는 1987년에 발매된 ‘슈퍼드라이'였다. 당시 맥주업체들은 맥주의 맛을 바꾸지 않고 병 용기만 바꾸는 데 치중했다. 아사히맥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히구치 사장은 소비자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로 했다. 그랬더니 용기보다 맛에 대한 평가가 더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5,000명을 대상으로 ‘지금의 맛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을까?'라고 물었더니 무려 87%의 응답자가 ‘맛을 바꿔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의 전략대로 영업사원이 매출을 올리는 데 집중하지 않고 소비자의 불만을 모으는 데 집중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소비자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히구치 사장은 소비자의 불만과 의견을 모아 새로운 제품을 만들기로 했다. ‘이 정도면 소비자의 마음에 들겠지'라면서 스스로 만족하던 관행에 철퇴를 가한 것이다.


젊은 사원의 고집으로 대히트작 ‘슈퍼드라이' 탄생

그러나 신제품 개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맛에 대한 논쟁이 붙었다. ‘가볍고도 잘 넘어가는 드라이맥주가 필요하다'는 원칙 아래 ‘쌉쌀한 맛'을 가미하느냐가 이슈였다. 알코올 음료에서 ‘드라이'는 와인의 맛이고 ‘쌉쌀한 맛'은 청주의 맛이다. 이 두 맛을 조화롭게 섞어 맥주를 만들어 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기술자인 고참 임원들은 “쌉쌀한 맛이 나는 맥주는 전례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개발팀의 젊은 사원들의 히구치 사장이 늘 말했던 대로 “전례가 없기에 도전해 보자”고 맞섰다.

히구치 사장은 논쟁을 멈추게 하고 개발을 지속시키면서 최종 결정은 소비자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 시음 평가에서 신제품의 맛을 본 소비자들은 만족해 했고, 이에 자신감을 얻어 시장에 선보이자 ‘깊이가 있으면서도 깔끔한, 달면서도 쓴 맛'이라며 뜨거운 반응이 돌아왔다.

1987년도에만 1,350만 박스를 팔았는데, 병으로 따지면 무려 2억 7,000만 병이라는 역대 최고 판매를 기록했다. 판매점에 물량을 대지 못해 직원들에게 “사지도, 마시지도 말고 회사 내 매점에도 진열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패배의식에 빠져 시장에서 퇴출될 위기까지 내몰린 아사히맥주, 맥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지만 히구치 사장은 아사히맥주를 일본 최고의 맥주회사로 재기시켰다. 히구치 사장은 1999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기까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느니 이제 해 보자'는 적극적인 자세와 역발상으로 일본 맥주시장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


- 명순영 / 매경이코노미 기자

출처 : 삼성(www.samsung.co.kr)

2008. 12. 16. 01:45

[위기 극복 기업 5편] 버버리 / 150년 트렌치코트의 위기, 30대 디자이너의 ‘버버리’ 살리기

[위기 극복 기업 5편] 버버리 / 150년 트렌치코트의 위기, 30대 디자이너의 ‘버버리’ 살리기

전통과 관록의 브랜드 ‘버버리'. 체크무늬로 상징되는 버버리의 전통적 디자인은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언제부터인가 버버리는 젊은층으로부터 외면 당했고, 노인들이나 입는 낡은, 시대에 뒤떨어진 브랜드로 전락해 버렸다. 전통이 오히려 발목을 잡은 셈이다.

그러나 전통은 역시 전통. 버버리의 CEO 로즈 마리는 2001년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크리스토퍼 베일리를 디자인 총책임자로 영입했다. 그가 개발한 ‘프로섬(Prorsum)' 라인은 젊은 패션 마니아들을 버버리 매장으로 다시 끌어들였다. 더 이상 묵직하고 낡은 중장년 세대의 ‘버버리'가 아닌 트렌치코트의 허리선이 한결 잘록해져 실루엣이 살아난 젊은 ‘버버리'가 재탄생되었다.


“영국이 낳은 것은 의회 민주주의와 스카치 위스키, 그리고 버버리 코결트다.” 영국인들은 스스럼없이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 말은 버버리 창시자인 토머스 버버리(Thomas Burberry)가 스스로 만든 말이라고 전해지지만, 영국인이라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얘기다. 영국하면 축축한 가랑비가 내리는 런던 거리에 버버리 코트 차림으로 걸어가는 영국 신사가 쉽게 연상되기 때문이다.

버버리는 소위 명품이라고 불리는 프리미엄급 브랜드의 선두 주자다. 152년을 이어 온 관록과 전통이 이를 뒷받침한다. 버버리는 현재 옥스포드 사전에 그 이름이 수록되어 있고, 10년마다 갱신되는 왕실의 인가와 함께 영국의 지정상인(Royal Warranty)으로서의 역사를 잇고 있다.

그러나 명품의 생명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전통'이라고 부를 만한 핵심 경쟁력을 간직하면서도, 동시에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 내고 변화를 줄 때만 명품으로서의 생명력을 갖게 된다. 버버리도 150여 년의 역사 동안 변화의 추세를 따르지 못해 위기를 맞기도 했다. 버버리의 탄생부터 성장, 위기 극복의 순간까지 시계추를 되돌려 보자.

1888년 영국 농부나 목동이 즐겨 입을 수 있는 혁신적 원단 개발

‘버버리' 브랜드의 창시자 토머스 버버리(Thomas Burberry)는 1835년 태어났다. 그는 스무 살 때인 1856년 영국 햄프셔 지방에서 작은 포목상 경영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농부나 목동들이 즐겨 입던 옷감에 관심을 가졌고, 1888년 ‘개버딘(Gabardine)'이라는 혁신적이 원단을 개발했다. 이 원단이 지금 버버리 코트의 출발점이다.

 

개버딘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고 세탁이 수월한 한편 습기의 영향을 덜 받았다. 비가 자주 오고 축축한 영국 기후에는 최적의 레인코트였던 셈이다.

1891년 런던 헤이마켓에서 첫 매장을 연 이후 개버딘은 인기를 끌었으며, 버버리는 개버딘 원단으로 추위와 강풍에도 견딜 수 있는 트렌치코트를 만들었다.

트렌치는 전쟁시 적의 탄환으로부터 몸을 피하는 곳인 참호(Trench)에서 유래한 말이다. 벨트에는 수류탄을 달 수 있도록 ‘D형 고리'를 부착하고 장총을 사용할 때 개머리판이 닿아 생길 수 있는 원단 마모를 줄이기 위해 오른쪽 가슴에 덧단을 대는 등 실용적으로 만들었다. 이 옷은 영국 군인들의 군복으로 채택됐고 대를 물리는 옷으로 여겨지게 됐다.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가 개버딘 코트를 입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내 버버리를 가져오게”라고 말해 버버리가 곧 트렌치코트를 지칭하는 패션 용어가 돼 버렸다. 마치 미국인들이 검색을 할 때 “Do you Yahoo?(당신 야후하세요?)”라고 묻거나 복사할 때 “Could you Xerox?(제록스해 주실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1990년대 모조품 늘면서 젊은층으로부터 외면

버버리는 120년 넘게 영화를 누렸다. 체크무늬로 상징되는 버버리의 전통적 디자인은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위기는 1990년대 들어 찾아왔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르면서 다양한 상품이 등장했다.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바뀐 것이다. 개성을 추구하는 소비자의 욕구도 강해졌다.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버버리는 젊은층으로부터 외면 당했고, 노인들이나 입는 낡은, 시대에 뒤떨어진 브랜드로 전락해 버렸다. 전통이 오히려 발목을 잡은 셈이다. 게다가 중국을 중심으로 가짜 상품, 이른바 ‘짝퉁'이 떠돌기 시작하면서 명품의 이미지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매출은 점점 하향세로 돌아섰다.

버버리가 내린 결단은 경영진부터 바꿔 보자는 것이었다. 1997년 로즈 마리 브라보(57)라는 걸출한 여성 CEO를 영입했다. 그는 미국 백화점인 삭스 피프트 애비뉴(Saks Fifth Avenue)의 사장 출신으로 미국 <포천>지가 선정한 최고의 소매상(Retailer)이였다.

로즈 마리는 말 탄 기사와 버버리 창업자 토머스 버버리의 흘림 서명을 새로운 브랜드 로고로 채택하면서 이미지 변화를 시도했다. 운영 시스템도 바꾸고 시장도 넓혔다. 버버리는 디자인, 머천다이징, 공급 체인을 독립적으로 운영해 왔으나 이를 중앙 집권 시스템으로 재정비했다. ‘하나의 회사에 하나의 브랜드(One Company, One Brand)' 전략으로 명품의 이미지를 통일하는 것부터 다시 시작했다.

또 불필요한 라이선스는 되사는 방식으로 라이선스 사업을 정비했다. 이같은 일련의 정책들은 브랜드 집중도를 높이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한때 버버리는 세일 등을 통한 명품 대중화 전략을 취했지만 오히려 브랜드 가치를 하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브랜드를 통일하고 새로운 상품으로 고급화를 추진하면서 다시 ‘명품'의 선두주자로 돌아온 것이다.

 

로즈 마리가 국외로 눈을 돌린 점도 주효했다. 신흥 부자들은 전통적인 명품 브랜드에 관심이 많다는 점을 고려해 중국과 중동, 동유럽, 러시아, 브라질, 인도 등 이머징마켓을 뚫었고 매출이 50% 이상 늘어나는 성과를 올렸다.

그는 코트에 한정되어 있던 버버리의 상품군도 넓혔다. 의류에서도 여성복, 남성복, 아동복, 액세서리 등으로 확대했다. 예를 들어 가죽과 독특한 금속 장식을 매치한 감각적인 핸드백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매출의 75%가 의류였지만, 핸드백과 구두, 스카프 등 액세서리 사업이 커지면서 신규 소비자도 늘어났다. 이런 성과 덕에 패션업계에서는 버버리를 두고 ‘로즈 마리의 아기(Rose Marie's Baby)'라 고 부르기도 했다.


‘버버리 프로섬' 라인으로 전통에 개성을 얹어

버버리를 살린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다면 크리스토퍼 베일리(37)다. 뉴욕 출신답게 로즈 마리는 버버리에 보다 신선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고자, 2001년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크리스토퍼 베일리를 디자인 총책임자로 영입했다. 1971년생으로 30대 초반의 치기 어린 젊은 디자이너가 150년 전통의 버버리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비판이 많았지만 그는 ‘명품도 변해야 산다'는 명제를 입증하기 시작했다.

버버리는 젊은 디자이너에게 ‘전통의 브랜드를 혁신'하라는 임무를 줬고 그는 성공적으로 개혁했다. 베이지색 바탕에 검은색과 붉은색이 교차한 전통 ‘버버리 체크'의 틀을 깨지 않으면서 개성을 살린 체크무늬를 선보였고, 가죽 등 새로운 소재를 사용했다.

그가 개발한 ‘프로섬(Prorsum)' 라인은 젊은 패션 마니아들을 버버리 매장으로 다시 끌어들였다. 라틴어로 ‘앞으로 나가다'라는 ‘프로섬'의 뜻대로 버버리를 한 발 더 전진시킨 것이다. 더 이상 묵직하고 낡은 중장년 세대의 ‘버버리'가 아닌 트렌치코트의 허리선이 한결 잘록해져 실루엣이 살아난 젊은 ‘버버리'가 재탄생되었다.

버버리 프로섬의 반응은 뜨거웠다. 일본 등 일부 국가에선 베일리가 만든 ‘버버리 프로섬' 라인을 예약해도 구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보그>, <엘르> 등 패션 전문지들은 ‘젊어진 버버리는 베일리 덕분'이라고 그를 한껏 치켜세웠다. 프로섬의 인기는 지금도 여전하다.

“버버리의 오랜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현대적이고 신선한 이미지를 더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서슴없이 말한다.

 

버버리는 완전히 부활했다. 2007년 10월부터 2008년 3월까지의 매출은 5억 5,000만 달러 수준으로 2년 연속으로 두 자릿수의 매출 증가세를 보이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한 사람이 10만 명, 20만 명을 먹여 살린다”며 “기업 사장들은 인재 영입에 온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고 주문한 일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버버리의 150년 브랜드 스토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천재급 인재가 기업의 위기 극복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를 보여 준 좋은 사례이다.


- 명순영 / 매경이코노미 기자

출처 : 삼성(www.samsung.co.kr)
2008. 12. 16. 01:43

[위기 극복 기업 4편] 닌텐도 / 폭력 게임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찾다

[위기 극복 기업 4편] 닌텐도 / 폭력 게임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찾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최근 ‘일본의 부호 40명'을 발표했다. 그중 일본 최고의 부호는 닌텐도 창업주의 손자 야마우치 히로시(80, Yamauchi Hiroshi) 고문이었다. 그의 재산은 무려 78억 달러. 지난해보다도 30억 달러(3조 6,000억 원)나 늘었다.

그의 급격한 재산 증가는 ‘닌텐도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듯하다. 굳이 ‘부활'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1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닌텐도 역시 위기의 순간을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강력한 경쟁자는 바로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 그리고 닌텐도 자신이었다. 닌텐도의 창업과 성장, 위기의 순간과 극복 과정을 조명해 본다

일본 교토는 보통 ‘오래된 도시'로만 인식된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일본 기업들이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종합 전자부품 메이커로 유명한 교세라, 음향용 전자부품 세계 1위 기업인 니치콘 등 작지만 실력 있는 ‘강소 기업'들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닌텐도도 교토에 본사를 둔 기업 중 하나이다.


화투 만드는 회사로 시작

야마우치 집안은 지금으로부터 119년 전인 1889년, 화투를 만드는 기업을 세웠다. 당시는 기업이라기보다는 작은 공장 정도의 규모였다. 작은 화투 공장의 본격적인 변신은 일본 최고 부호로 뽑힌 야마우치 히로시가 주도했다.

화투 제작 사업이 잘되면서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945년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중퇴하고 스물 두 살의 나이로 닌텐도 사장에 취임한다. 그 뒤 일본 최초로 얇은 플라스틱을 사용한 트럼프를 개발해 업계를 휩쓸었다.

 

야마우치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트럼프와 게임시장을 둘러본 후 트럼프시장이 너무 작다는 생각으로 다양한 산업 분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식품, 택시, 호텔, 교육 등에서 실패를 맛보면서 1960년 도산의 궁지에 몰렸다.

이때가 첫 번째 위기다. 다행스럽게 사업 다각화 실패로 인한 위기는 오히려 닌텐도가 게임 산업에 몰입하는 계기가 됐다.

그 뒤 연구 개발을 거듭한 끝에 1977년 첫 게임기를 출시했으나 조악한 수준에 그쳐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후 1979년 세계 최초의 휴대형 게임기인 ‘게임앤와치(Game & Watch)'를 발매해 대히트를 쳤다.

1983년에는 패밀리 컴퓨터라는 뜻의 ‘패미콤'을 선보이면서 비디오 게임시장을 열었다. 닌텐도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슈퍼마리오'를 앞세워 전 세계 비디오 게임시장을 석권했다. 슈퍼마리오 시리즈는 지금까지 세계에서 총 1억 8,000만 카피가 팔린 베스트셀러다.

시장에 내놓은 제품들마다 성공으로 이어지자 닌텐도 앞에는 ‘게임 기업의 전설, 신화, 파이어니어….'와 같은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2002년에는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무차입 근육질 경영, 강력한 시장 지배력, 부동의 소비자 신뢰도 등을 이유로 일본 최고의 우량회사로 선정하기도 했다.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마이크로소프트 X-Box 등 강력한 라이벌 등장

하지만 기업에게 기회와 위기의 사이클은 반복되기 마련이다. 닌텐도의 최대 위기는 다른 사업으로 눈을 돌려서가 아니라 바로 게임 업계 경쟁자의 출현이었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와 마이크로소프트의 ‘X-Box'는 강력한 경쟁자였다.

이들은 화려한 영상으로 게임의 멀티미디어 수준을 업그레이드시켰다. 간단한 그래픽과 스토리에 의존하는 닌텐도가 이들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여기에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게임 보급으로 영업 기반은 갈수록 위축되었다.

스스로의 문제도 불거졌다. 닌텐도가 너무 잘나가면서 미래를 내다보지 않고 현실에 안주한 것이다. 한 언론은 “게임시장 발전 속도는 빠르고 소비자들은 더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있는데 닌텐도 회사 분위기는 ‘천하태평'하고 위기 의식을 전혀 느낄 수 없다”며 “만들면 몽땅 팔리는 성공 경험으로 인해 영업 조직이 열정을 잃어버렸다”고 꼬집었다. 닌텐도의 매출은 떨어졌고 ‘닌텐도의 시대는 저물었다'는 성급한 평가도 나왔다.


위기 극복 비결 1: 과감한 선택! 협력업체 직원을 본사 사장에 앉히다

닌텐도에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킨 사람 역시 야마우치 히로시였다. 그는 작은 화투 제작사에 머무를 뻔했던 닌텐도를 세계적인 게임 전문회사로 이끈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위기에도 과감하게 대처했다. 2000년 닌텐도의 협력사인 할(HAL) 연구소 소장 이와타를 사장으로 앉혔다. 협력업체 출신이라 본사 지지 기반이 약하다는 약점이 있었지만 상품 개발 능력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와타 사장은 야마우치 히로시를 실망시키지 않고 조용히 혁신을 이끌어 냈다. 그는 닌텐도의 조직을 정비하고 직원들의 마인드를 바꿨다. 급격한 인력과 사업 구조조정을 피했다. 개발 실패로 사내에서 외면 받던 직원들을 모아 사장 직속의 프로젝트팀을 꾸렸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변혁 사례는 최대 라이벌이었던 소프트웨어 메이커 ‘나무코'와 손잡고 소프트웨어 개발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이 전략적 제휴로 닌텐도는 ‘나 홀로 성공했다'는 안이한 자만심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세가, 반다이 등 담을 쌓고 적대시했던 소프트웨어 메이커들과도 제휴를 맺으면서 ‘외톨이' 이미지에서 벗어났다.

영업도 활발하게 추진했다. 마케팅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영업사원들이 주말마다 전자 양판점 게임 매장으로 출근해 고객들 앞에서 시범 조작을 보이는 등의 적극성을 보였다.


위기 극복 비결 2: 독창성과 단순함으로 승부하다

닌텐도의 명성을 되찾게 한 제품은 ‘닌텐도 DS'와 ‘위(Wii)'다. 2004년 말에 출시된 휴대용 게임기 닌텐도 DS는 연령과 성별을 떠나 전 세계 5,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즐기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해 초 선보인 닌텐도 DS 라이트는 출시 1년 만에 판매 대수가 100만 대를 넘어서는 등 인기를 끌었다. 2006년 말에 출시된 위(Wii)도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일본에서는 몸을 이용해 즐기는 게임인 ‘위'를 거실에 설치하고 가족들이 함께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위'는 전 세계에 2,000만 대 이상 팔렸다.

 

이 두 게임의 특징은 독창성과 단순함에 있다. 이와타 사장도 올해 한국에서 ‘위'를 선보이며 “닌텐도의 기본 철학인 독창성이 성공을 이끌어 냈다”고 자평했다.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의 게임이 첨단기술을 활용해 실제에 가까운 환상의 세계로 게임을 이끌었다면 닌텐도는 일상 속에서 함께 호흡하는 생활의 일부로 게임을 개발했다. 첨단 기술에 집착하지 않고 독창성에 승부를 띄운 것이다.

디자인도 심플하기 이를 데 없지만, 성능도 단순해 사용자가 게임을 즐기는 데 부담이 없다. 그동안 IT뿐만 아니라 많은 전자업계가 기능을 확대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빠져 있었다. 사용자가 이해하기도 어렵고 굳이 사용하지도 않는 기능을 마구 넣은 것이다. 닌텐도는 역으로 될 수 있는 대로 쉽고 단순한 게임으로 고객의 마음을 끌었다.


위기 극복 비결 3: 고객의 범위를 넓히다

마지막 위기 극복 비결은 고객의 범위를 넓히는 데 있었다. 바로 마케팅의 기본으로 돌아간 것이다. 마케팅(Marketing, 시장)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알 수 있듯, 마케팅 행위의 기본은 시장을 넓혀 가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고객 수요층을 확대하는 것이다. 닌텐도는 고객층을 다양하게 만드는 데 충실했다.말 그대로 게임 인구의 저변 확대다.

이와타 사장도 한국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닌텐도 회생을 위해 연령, 성별, 게임 경험 유무에 상관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게임 개발을 목표로 했다”며 “젊은 남성뿐만 아니라 5세부터 95세까지 게임 인구를 확대하는 것에 주력했다”고 강조했다.

닌텐도는 다른 기업의 귀감이 될 만큼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했다.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게임이 난무하는 가운데 닌텐도는 가족 중심의 생활형 게임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게임은 누구나 재미있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야마구치 히로시 고문의 꿈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 손녀와 함께 닌텐도 게임을 즐기는 가정의 모습으로 현실화됐다.


- 명순영 / 매경이코노미 기자

출처 : 삼성(www.samsu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