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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19 [영화로 본 문화 읽기] 혹시 멀미나는 영화 〈클로버필드〉를 보셨는지? - 괴수영화 〈클로버필드〉를 통해 본 창조경영의 키워드
  2. 2008.08.29 [옮김] 덤의 문화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09. 3. 19. 23:22

[영화로 본 문화 읽기] 혹시 멀미나는 영화 〈클로버필드〉를 보셨는지? - 괴수영화 〈클로버필드〉를 통해 본 창조경영의 키워드

[영화로 본 문화 읽기] 혹시 멀미나는 영화 〈클로버필드〉를 보셨는지? - 괴수영화 〈클로버필드〉를 통해 본 창조경영의 키워드


괴수영화 〈클로버필드〉는 개봉과 함께 뜨거운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화면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카메라 렌즈의 초점도 맞지 않아 상영 시간 내내 눈이 아파 보기 힘든 영화인 것.

그럼에도 〈클로버필드〉는 지난 2008년 1월 미국에서 개봉되자마자 역대 1월 셋째 주 개봉영화 중 최고의 흥행성적을 거뒀다. 도대체 이 해괴망측한 영화의 흥행 비밀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멀미나는 영화 <클로버필드>, 미국에서 흥행 대박

혹시 괴수영화 〈클로버필드(Cloverfield)〉를 보셨는지.

이 80분짜리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나서 “와! 재미있다”고 환호작약하는 관객에 대해 적어도 한 가지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 사람은 자동차 멀미는 물론 뱃멀미, 비행기 멀미, 심지어 테마파크 롤러코스터 멀미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 그 어떤 멀미에도 끄떡하지 않을 인물이란 것.

이 영화, 정말 어지럽다. 마치 높이 30m의 파도 위 통통배에 탄 심정이랄까? 화면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카메라 렌즈의 초점조차 제대로 맞지 않아 눈이 아플 지경이니…. 그런데 기가 막힌 일은 이런 황당한 영화가 미국에서 지난 2008년 1월 개봉되자마자 역대 1월 셋째 주 개봉영화 중 최고의 흥행성적을 거두는 기염을 토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를 둘러싼 한층 더 황당무계한 ‘사건' 하나 더. 뭔가 무시무시한 비밀을 담고 있는 듯 보이는 영화의 제목 <클로버필드>는 무슨 뜻일까? 주인공의 이름? 괴수의 이름? 아니면 천하무적 괴수를 쳐부술 결정적인 비밀병기의 이름?

모두 아니다. ‘클로버필드'란 단어는 아무리 눈 씻고 살펴봐도 영화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왜냐고? ‘클로버필드'란 말은 영화의 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 ‘클로버필드'는 이 영화를 제작한 J.J. 에이브람스 감독(유명한 미국 드라마 〈로스트〉와 영화 〈미션 임파서블 3〉의 감독)의 사무실이 있는 로스앤젤레스의 거리 이름이다. 그럼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제목을 붙였느냐고? 그냥, 재미로 그런 거다!

이처럼 영화나 소설에서 뭔가 중요한 사건이나 사실인 것처럼 꾸며서 관객이나 독자의 관심을 엉뚱한 데로 돌리는 속임수를 ‘맥거핀 효과(MacGuffin Effect)'라 한다. 스릴러 영화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년)가 대표적. 이 영화 속 주인공은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할 결정적 단서를 가진 ‘조지 캐플란'이란 인물을 추적하지만 알고 보면 조지 캐플란은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아무튼 〈클로버필드〉는 개봉과 함께 뜨거운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괴수가 등장하는 블록버스터 영화치고는 너무나 해괴망측했기 때문이다. 줄거리는 무지하게 간단하다. 어느 날 미국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 괴수가 나타나고, 때마침 인근 파티장에 모여 있던 주인공 일행이 캠코더를 들고 괴수를 쫓아가며 괴수의 모습을 캠코더에 담는다는 얘기다.

〈클로버필드〉의 스토리는 기존 괴수영화 블록버스터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괴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괴물이 어떻게 탄생해 어떤 경로로 맨해튼에 당도하게 된 것인지, 그리고 그 괴물이 결국엔 어떤 종말을 맞게 되는지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기 때문이다. 아! 관객으로선 복장 터질 노릇이다.

허나 여기서 놀라기엔 이르다. 이 영화의 핵심은 ‘무엇(what)을 보여 주느냐'가 아니라, ‘어떻게(how) 보여 주느냐'에 있으니 말이다. 놀라지 마시라! 영화의 모든 장면은 주인공 일행이 캠코더에 담은 모습이 전부이다.

이 영화는 ‘아비규환이 된 맨해튼에서 한 남자가 괴물을 따라가며 자신의 캠코더로 찍은 내용이 영화의 전부'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니 화면이 미친 듯이 흔들리는 건 기본. 중간 중간 이야기가 뚝뚝 끊기다 못해 괴물이 등장하는 결정적인 순간에도 카메라 초점이 맞지 않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클라이맥스에서 만큼은 괴수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여야 하건만 이 영화에선 괴수의 전신이 제대로 드러나는 법 없이 슬쩍 지나가는 꼬리나 발끝 같은 일부분만 보여 준다. 하긴 캠코더에 어렵사리 담긴 괴물의 모습이니 무얼 더 바라겠는가! 상영 시간이 80분이란 점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두어 시간쯤 상영되었다면 거대한 스크린을 바라보다가 발작증세를 보이는 관객들이 속출하지 않았을까?


누구나 감독, 배우
가 될 수 있는 시대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클로버필드〉에 미친 듯이 열광했으니 말이다. 왜 미국의 신세대는 〈클로버필드〉에 열광했을까? 셈에 밝은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왜 이런 황당한 영화를 기획했을까?

아니다. 이 영화는 변화한 시대, 변화한 관객을 공략하기 위한 할리우드의 영악한 전략에서 탄생했다. 할리우드는 새로운 세대의 인식과 취향, 트렌드를 읽었다. 요즘 세대에게 영화는 더 이상 재능 있는 감독만이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창조물이 아니다. 이제 영화는 하나의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나 만들 수 있고, 누구나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젠 누구나 영화를 직접 만들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작은 캠코더나 휴대전화 카메라 하나면 충분하다. 나를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면, 나는 곧바로 내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클로버필드〉는 과감하게도 ‘UCC 형태의 영화'라는 발상을 했던 것이다.

당연히 이 영화는 모든 장면이 주인공 일행의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된다. 카메라를 들고 괴수를 찍은 바로 그 인물의 시점으로 영화가 전개되는 것. 결국 관객은 영화를 단순히 ‘관람(watch)'하는 게 아니라, 카메라를 든 인물의 시점이 되어 영화를 온전히 ‘체험(experience)'하게 되는 것이다.

〈클로버필드〉는 유튜브 세대를 겨냥해 만든 대중문화 상품이다. 캠코더나 휴대전화로 찍은 UCC를 유튜브에 마구 올리는 동영상 세대의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을 블록버스터의 새로운 문법으로 가져오는 엄청난 모험을 걸었던 것.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무엇(what)을 하느냐'
보다 '어떻게(how) 하느냐'가 관건

그런데 더욱 재미난 사실이 있다. 이런 ‘인식의 혁명'과 ‘시각의 혁명'을 통해서 〈클로버필드〉는 제작비를 엄청나게 절약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한 아마추어가 캠코더를 들고 마구 뛰어다니면서 괴수를 어렵사리 찍은 조악한 화면'이란 전제로 출발을 하니, 괴물을 선명하게 보여 줄 까닭이 전혀 없지 않은가? 이렇게 해서 영화는 컴퓨터그래픽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였고 종국엔 단돈 3,000만 달러(약 450억 원)로 ‘괴물 블록버스터'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통상 괴수 블록버스터 한 편의 제작비는 2억 달러 남짓이다).

영화 〈클로버필드〉의 흥행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지혜롭게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고 있음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기존의 블록버스터들이 ‘더 크게, 더 세게, 더 화려하게, 더 비싸게'를 외칠 때, 이 영화는 불현듯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왜 더 커야 하지? 왜 더 화려해야 하지? 왜 더 비싸야 하지?”

그렇다. 〈클로버필드〉는 ‘더 작고, 더 조악하고, 더 값싼' 블록버스터를 만들겠다는 역발상을 했던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관건은 ‘무엇(what)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how)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이 바로 창조경영의 해법이 아닐까.

※ 〈클로버필드〉는 국내에서도 2008년 1월 개봉되었으나 흥행에서 참패했다.

- 이승재 / 동아일보 영화담당기자로 삼성경제연구소 온라인지식서비스 ‘SERI CEO'에서 〈대중문화 읽기〉를 강의 중이며 저서로 〈영화관에서 글쓰기〉(2008년)가 있다.

출처 : 삼성(www.samsu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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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김] 덤의 문화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명사]: 제 값어치 외에 거저로 조금 더 얹어 주는 일. 또는 그런 물건

 

덤이라는 말은 내가 주체일 때는 뭔가 하나를 더 주었다는 긍정의 표현이 되지만 내가 객체가 되었을 때는 잉여인생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만큼 덤의 문화는 우리에게 양날의 칼처럼, 동전의 양면처럼 작용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덤이라는 것이 조금 더 얹어 주는 일이라는 주체적인 표현임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근래 우리의 덤 문화가 주체가 되기보다는 객체가 되려는 움직임이 강했음을 깨닫게 된다.

 

덤은 더하는 문화다. 나의 여유로움을 떠나 상대의 행복을 더해주는 선물의 문화가 바로 덤이다. 덤은 빼기의 문화다. 나의 것을 빼어 행복을 찾는 역발상의 문화가 바로 덤이다. 덤은 곱하기의 문화다. 내가 줌으로써 나와 너, 우리가 행복해지는 제곱의 문화가 바로 덤이다. 덤은 나누기의 문화다. 나의 것을 나누고 행복을 나누고 나아가 우리 모두의 넉넉한 삶을 나누는 시너지의 경제학이 바로 덤이다.

 

얼마 전에 퇴진한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의 사회공헌활동이 화제다.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세계 최고의 부자가 보여주는 진정한 덤의 문화이기 때문이 주목 받는 것이다. 그가 주창하는 창조적 자본주의야말로 덤이라는 우리문화 속에 숨어 있는 진정한 무의식이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도 창조적이라는 말이 더해지면 행복한 개인주의가 될 수 있듯이,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하는 덤 문화의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덤과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행하(行下)라는 우리의 옛 풍습을 살펴보자. 행하란 경사가 있을 때 주거나, 위로조로 내리는 금품, 품삯을 뜻하는 말이다. 주로 놀이나 놀음이 끝난 뒤 기생이나 광대에게 준 보수를 행하라고도 하였다. 또한 새로 관직에 임명된 관리가 인사와 관계가 있는 중앙 여러 관부의 관리들에게 음식을 내려 주는 것도 행하라 하였다. 결국 행하라는 것은 Bottom-Up의 문화가 아니라 Top-Down 혹은 잘못된 Bottom-Up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덤의 문화는 행하와는 다르다. 그것은 자발적인 동기로 발원하는 풍류의 문화였기 때문이다.

 

덤의 부정적인 모습이 바로 행하의 문화이며, 행하의 현대적인 모습들이 바로 부정과 부패로 연결되는 우리 정치와 경제의 관습이다. 있는 사람들이 나누는 것이 진정한 덤의 문화일진대, 요즘의 덤은 서민의 미소 속에서만 살필 수 있는 희귀한 문화로 존재하게 되었다. 가진 사람들의 덤은 행하로 변질되어 Top-Down 혹은 잘못된 Bottom-Up의 시끄러운 이중곡만을 연주하는 사회의 종양이 되어 버렸다. 수술이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행하문화의 수술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저 밑바닥의 아름다운 덤 문화를 차근차근 올려 보내는 일이 더욱 쉬운 일이다. 검은 물과 맑은 물이 섞여서 어떤 물이 될지는 위대한 국민들의 몫이라 믿는다.

 

한국경제의 기적은 낭만주의의 소산이다. 당당한 자신감으로 무장한 꿈을 꾸는 경제인들과 국민들의 열정이 있었기에 우리는 200년이나 걸리는 경제성장을 단 60년 만에 이룩할 수가 있었다. 한국적 낭만주의에는 덤의 문화가 숨어 있다. 사장의 영광을 직원들과 나누고 회사의 영광을 다른 회사와 나누고, 경제의 영광을 나라와 나누는 덤의 문화야말로 한국경제가 기적을 만들 수 있었던 낭만주의의 핵심정신이 아닐까? 하지만 일찍 터뜨린 샴페인은 우리가 만든 기적의 철학을 일찌감치 감춰 버렸다.

 

우리 영토의 문제를 다른 나라에 기대어 해결하려는 정치의 현실과 독점과 과점을 지상과제로 여기며 협력을 군림으로 여기는 경제의 현실. 피와 땀으로 일군 경제의 기적이 끝나기도 전에 영리한 펜대만 굴리며 재산증식을 기대하는 국민들. 부동산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주식이라는 공인된 도박 속에서 성장을 부르짖는 어리석은 민중의 메아리가 바로 덤의 문화가 상실된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믿음직한 지도자는 대통령 개인이 아니라 바로 위대한 민중 자신들이라는 사실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지금이야말로 덤의 문화로 행복했던 우리 선인들의 지혜를 배워야 할 때다.

 

진정한 덤의 문화가 사회 곳곳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고달픈 현실 생활 속에서도 늘 마음의 여유를 갖고 즐겁게 살아갈 줄 아는 삶의 지혜와 멋, 즉 풍류(風流)정신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칠 줄 모르고 채우기만 하는 우리의 검은 머리를 풍류의 정신으로 깨끗이 세탁해야 할 때다. 풍류의 정신이야말로 한국경제의 새로운 도약을 이끌 제2의 낭만주의이며 사라진 덤의 문화를 복원시켜 문화강국 대한민국을 만들어 줄 영원한 처방약이라고 믿는다. 부족한 글을 백범 김구 선생님의 나의 소원을 빌어 마칠까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백범 김구, '나의 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