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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16 [위기 극복 기업 5편] 버버리 / 150년 트렌치코트의 위기, 30대 디자이너의 ‘버버리’ 살리기
  2. 2008.10.25 시스템으로 자리잡은 삼성의 디자인경영
  3. 2008.10.25 [디자인 경영] 삼성그룹 … 보르도 TVㆍ햅틱폰 … 삼성魂을 담다
2008. 12. 16. 01:45

[위기 극복 기업 5편] 버버리 / 150년 트렌치코트의 위기, 30대 디자이너의 ‘버버리’ 살리기

[위기 극복 기업 5편] 버버리 / 150년 트렌치코트의 위기, 30대 디자이너의 ‘버버리’ 살리기

전통과 관록의 브랜드 ‘버버리'. 체크무늬로 상징되는 버버리의 전통적 디자인은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언제부터인가 버버리는 젊은층으로부터 외면 당했고, 노인들이나 입는 낡은, 시대에 뒤떨어진 브랜드로 전락해 버렸다. 전통이 오히려 발목을 잡은 셈이다.

그러나 전통은 역시 전통. 버버리의 CEO 로즈 마리는 2001년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크리스토퍼 베일리를 디자인 총책임자로 영입했다. 그가 개발한 ‘프로섬(Prorsum)' 라인은 젊은 패션 마니아들을 버버리 매장으로 다시 끌어들였다. 더 이상 묵직하고 낡은 중장년 세대의 ‘버버리'가 아닌 트렌치코트의 허리선이 한결 잘록해져 실루엣이 살아난 젊은 ‘버버리'가 재탄생되었다.


“영국이 낳은 것은 의회 민주주의와 스카치 위스키, 그리고 버버리 코결트다.” 영국인들은 스스럼없이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 말은 버버리 창시자인 토머스 버버리(Thomas Burberry)가 스스로 만든 말이라고 전해지지만, 영국인이라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얘기다. 영국하면 축축한 가랑비가 내리는 런던 거리에 버버리 코트 차림으로 걸어가는 영국 신사가 쉽게 연상되기 때문이다.

버버리는 소위 명품이라고 불리는 프리미엄급 브랜드의 선두 주자다. 152년을 이어 온 관록과 전통이 이를 뒷받침한다. 버버리는 현재 옥스포드 사전에 그 이름이 수록되어 있고, 10년마다 갱신되는 왕실의 인가와 함께 영국의 지정상인(Royal Warranty)으로서의 역사를 잇고 있다.

그러나 명품의 생명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전통'이라고 부를 만한 핵심 경쟁력을 간직하면서도, 동시에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 내고 변화를 줄 때만 명품으로서의 생명력을 갖게 된다. 버버리도 150여 년의 역사 동안 변화의 추세를 따르지 못해 위기를 맞기도 했다. 버버리의 탄생부터 성장, 위기 극복의 순간까지 시계추를 되돌려 보자.

1888년 영국 농부나 목동이 즐겨 입을 수 있는 혁신적 원단 개발

‘버버리' 브랜드의 창시자 토머스 버버리(Thomas Burberry)는 1835년 태어났다. 그는 스무 살 때인 1856년 영국 햄프셔 지방에서 작은 포목상 경영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농부나 목동들이 즐겨 입던 옷감에 관심을 가졌고, 1888년 ‘개버딘(Gabardine)'이라는 혁신적이 원단을 개발했다. 이 원단이 지금 버버리 코트의 출발점이다.

 

개버딘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고 세탁이 수월한 한편 습기의 영향을 덜 받았다. 비가 자주 오고 축축한 영국 기후에는 최적의 레인코트였던 셈이다.

1891년 런던 헤이마켓에서 첫 매장을 연 이후 개버딘은 인기를 끌었으며, 버버리는 개버딘 원단으로 추위와 강풍에도 견딜 수 있는 트렌치코트를 만들었다.

트렌치는 전쟁시 적의 탄환으로부터 몸을 피하는 곳인 참호(Trench)에서 유래한 말이다. 벨트에는 수류탄을 달 수 있도록 ‘D형 고리'를 부착하고 장총을 사용할 때 개머리판이 닿아 생길 수 있는 원단 마모를 줄이기 위해 오른쪽 가슴에 덧단을 대는 등 실용적으로 만들었다. 이 옷은 영국 군인들의 군복으로 채택됐고 대를 물리는 옷으로 여겨지게 됐다.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가 개버딘 코트를 입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내 버버리를 가져오게”라고 말해 버버리가 곧 트렌치코트를 지칭하는 패션 용어가 돼 버렸다. 마치 미국인들이 검색을 할 때 “Do you Yahoo?(당신 야후하세요?)”라고 묻거나 복사할 때 “Could you Xerox?(제록스해 주실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1990년대 모조품 늘면서 젊은층으로부터 외면

버버리는 120년 넘게 영화를 누렸다. 체크무늬로 상징되는 버버리의 전통적 디자인은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위기는 1990년대 들어 찾아왔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르면서 다양한 상품이 등장했다.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바뀐 것이다. 개성을 추구하는 소비자의 욕구도 강해졌다.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버버리는 젊은층으로부터 외면 당했고, 노인들이나 입는 낡은, 시대에 뒤떨어진 브랜드로 전락해 버렸다. 전통이 오히려 발목을 잡은 셈이다. 게다가 중국을 중심으로 가짜 상품, 이른바 ‘짝퉁'이 떠돌기 시작하면서 명품의 이미지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매출은 점점 하향세로 돌아섰다.

버버리가 내린 결단은 경영진부터 바꿔 보자는 것이었다. 1997년 로즈 마리 브라보(57)라는 걸출한 여성 CEO를 영입했다. 그는 미국 백화점인 삭스 피프트 애비뉴(Saks Fifth Avenue)의 사장 출신으로 미국 <포천>지가 선정한 최고의 소매상(Retailer)이였다.

로즈 마리는 말 탄 기사와 버버리 창업자 토머스 버버리의 흘림 서명을 새로운 브랜드 로고로 채택하면서 이미지 변화를 시도했다. 운영 시스템도 바꾸고 시장도 넓혔다. 버버리는 디자인, 머천다이징, 공급 체인을 독립적으로 운영해 왔으나 이를 중앙 집권 시스템으로 재정비했다. ‘하나의 회사에 하나의 브랜드(One Company, One Brand)' 전략으로 명품의 이미지를 통일하는 것부터 다시 시작했다.

또 불필요한 라이선스는 되사는 방식으로 라이선스 사업을 정비했다. 이같은 일련의 정책들은 브랜드 집중도를 높이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한때 버버리는 세일 등을 통한 명품 대중화 전략을 취했지만 오히려 브랜드 가치를 하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브랜드를 통일하고 새로운 상품으로 고급화를 추진하면서 다시 ‘명품'의 선두주자로 돌아온 것이다.

 

로즈 마리가 국외로 눈을 돌린 점도 주효했다. 신흥 부자들은 전통적인 명품 브랜드에 관심이 많다는 점을 고려해 중국과 중동, 동유럽, 러시아, 브라질, 인도 등 이머징마켓을 뚫었고 매출이 50% 이상 늘어나는 성과를 올렸다.

그는 코트에 한정되어 있던 버버리의 상품군도 넓혔다. 의류에서도 여성복, 남성복, 아동복, 액세서리 등으로 확대했다. 예를 들어 가죽과 독특한 금속 장식을 매치한 감각적인 핸드백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매출의 75%가 의류였지만, 핸드백과 구두, 스카프 등 액세서리 사업이 커지면서 신규 소비자도 늘어났다. 이런 성과 덕에 패션업계에서는 버버리를 두고 ‘로즈 마리의 아기(Rose Marie's Baby)'라 고 부르기도 했다.


‘버버리 프로섬' 라인으로 전통에 개성을 얹어

버버리를 살린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다면 크리스토퍼 베일리(37)다. 뉴욕 출신답게 로즈 마리는 버버리에 보다 신선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고자, 2001년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크리스토퍼 베일리를 디자인 총책임자로 영입했다. 1971년생으로 30대 초반의 치기 어린 젊은 디자이너가 150년 전통의 버버리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비판이 많았지만 그는 ‘명품도 변해야 산다'는 명제를 입증하기 시작했다.

버버리는 젊은 디자이너에게 ‘전통의 브랜드를 혁신'하라는 임무를 줬고 그는 성공적으로 개혁했다. 베이지색 바탕에 검은색과 붉은색이 교차한 전통 ‘버버리 체크'의 틀을 깨지 않으면서 개성을 살린 체크무늬를 선보였고, 가죽 등 새로운 소재를 사용했다.

그가 개발한 ‘프로섬(Prorsum)' 라인은 젊은 패션 마니아들을 버버리 매장으로 다시 끌어들였다. 라틴어로 ‘앞으로 나가다'라는 ‘프로섬'의 뜻대로 버버리를 한 발 더 전진시킨 것이다. 더 이상 묵직하고 낡은 중장년 세대의 ‘버버리'가 아닌 트렌치코트의 허리선이 한결 잘록해져 실루엣이 살아난 젊은 ‘버버리'가 재탄생되었다.

버버리 프로섬의 반응은 뜨거웠다. 일본 등 일부 국가에선 베일리가 만든 ‘버버리 프로섬' 라인을 예약해도 구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보그>, <엘르> 등 패션 전문지들은 ‘젊어진 버버리는 베일리 덕분'이라고 그를 한껏 치켜세웠다. 프로섬의 인기는 지금도 여전하다.

“버버리의 오랜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현대적이고 신선한 이미지를 더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서슴없이 말한다.

 

버버리는 완전히 부활했다. 2007년 10월부터 2008년 3월까지의 매출은 5억 5,000만 달러 수준으로 2년 연속으로 두 자릿수의 매출 증가세를 보이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한 사람이 10만 명, 20만 명을 먹여 살린다”며 “기업 사장들은 인재 영입에 온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고 주문한 일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버버리의 150년 브랜드 스토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천재급 인재가 기업의 위기 극복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를 보여 준 좋은 사례이다.


- 명순영 / 매경이코노미 기자

출처 : 삼성(www.samsung.co.kr)
2008. 10. 25. 23:44

시스템으로 자리잡은 삼성의 디자인경영

시스템으로 자리잡은 삼성의 디자인경영

회장은 떠나도 디자인은 남는다

 

 

삼성전자 LCD TV 1분기 북미 시장 1위, 햅틱폰 단기간 10만대 돌파, 디자인경영 대통령상 수상에 빛나는 래미안, 제일모직의 10꼬르소꼬모….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일선 퇴진 방침과 별개로 최근 삼성 계열사들의 호실적을 설명하는 아이콘들이다. 그간 끊임없이 강조해왔던 삼성의 디자인경영이 서서히 꽃피고 있는 것이다.

인터브랜드는 삼성전자가 브랜드 가치에서 소니를 제치며 급상승한 주요 요인으로 ‘획기적인 디자인(Cutting Edge Design)’을 꼽은 바 있다. 매경이코노미는 시스템으로 자리 잡은 삼성 디자인 저력의 비결을 짚어봤다.

비결 1경영진의 의지

원대연 SADI(Samsung Art & Desi gn Institute) 학장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93년 발언을 삼성 디자인경영의 시발점으로 본다. 당시 화제가 됐던 ‘마누라,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발언은 혁신을 강조하는 핵심 어록으로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원 학장은 “이 발언 이후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전환되는 이른바 ‘신경영’ 선언이 이어졌고 결국 소프트웨어, 즉 디자인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라고 전했다.

이후 95년 SADI 개원, 96년 삼성전자의 ‘디자인 혁명’ 선언 등 후속 조치들은 급물살을 탔다. 삼성전자는 2001년부터는 CEO 직속의 디자인경영센터를 조직하고 CEO 주재의 디자인위원회를 통해 주요 디자인 전략을 전사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2005년은 삼성그룹의 디자인이 한차례 업그레이드된 해로 기록된다. 이건희 회장이 ‘제2 디자인 혁명’을 선언했기 때문. 4대 전략으로 △독창적 디자인과 유저 인터페이스 체계 구축 △디자인 우수인력 확보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조직문화 조성 △금형기술 인프라 강화 등이 제시됐고 전 계열사는 이를 묵묵히 따르면서 국제적인 경쟁력을 확보해가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최지성 정보통신 총괄 사장이 디자인경영센터장을 겸임하면서 히트상품인 보르도TV 신화에 이어 애니콜 디자인 혁명도 이어가고 있다는 평을 듣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제일모직은 이건희 회장의 둘째딸 이서현 상무보가 디자인을 직접 챙기면서 더욱 힘이 실리는 모양새다.

박상용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경영자의 의지가 결국 사운을 좌우한다는 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며 “이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이런 정신이 공유되기에 회사 실적에 큰 영향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결 2 인재에 관한 한 ‘흑묘백묘’

삼성그룹의 디자인 경쟁력 핵심 중 또 하나는 ‘흑묘백묘(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뜻)’로 요약된다. 외부 인재 영입은 물론 외부 전문가와 공동 작업도 마다하지 않는 유연함이 강점이다.

삼성물산 건설부문(이하 삼성건설)은 2005년부터 래미안의 주거형태, 조명 배치, 조경 등을 이돈태 탠저린 사장에게 자문했다.

이돈태 디자인고문 영입 이후 개선된 래미안 지하주차장 디자인.
권혁우 삼성건설 디자인실 차장은 “디자인의 중요성을 안다고 해도 이를 어떻게 아파트에 적용할까에 대한 고민이 많을 때”였다며 “하나의 개념 아래 아파트의 내외부 디자인을 다시 해야 한다는 개념을 이돈태 사장을 통해서 알게 됐다”라고 전했다. 여기서 얘기가 끝나면 철저한 ‘아웃소싱’에 방점이 찍힐 터.

하지만 삼성건설은 이듬해 이 사장에게 디자인고문이라는 직함을 줘 장기적으로 삼성건설의 디자인 전략을 짜도록 했다. 이 고문은 탠저린 사장이란 직책을 유지하면서 일주일에 한두 번 삼성건설에 출근해 각 프로젝트를 점검하고 결정이 민감한 사안에 대해 조언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제일모직의 10꼬르소꼬모도 같은 맥락. 제일모직은 서울 청담동에 명품편집숍을 준비하면서 내부 논의 끝에 자체 브랜드보다 해외 유명 브랜드가 낫다는 결론을 냈다. 내부 콘셉트, 인테리어 등도 10꼬르소꼬모의 창립자 카를라 소차니에게 대부분 일임했다. 이로써 제일모직은 보다 세련된 이미지를 얻게 된 것은 물론 매장 내 각 브랜드의 매출 추이를 기반으로 판매 전략을 수립하는 등 디자인경영의 전초기지로 삼을 수 있게 됐다. 삼성전자의 경우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협업은 일찌감치 자리매김한 분위기다. 아르마니폰, 아르마니 LCD TV 등이 그 결과물들이다.

비결 3 ‘메기론’ 내부경쟁

이건희 회장이 93년 신경영 선언 시 내건 경영론 중 하나가 ‘메기론’이다. 미꾸라지를 키우는 논에 포식자인 메기를 넣어 두면 메기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운동한다는 것. 조직의 활력을 불어넣는 ‘내부경쟁’을 장려하는 것이 핵심이다.

디자인경영에도 이는 적용되고 있다. 삼성건설의 경우 2005년 업계 최초로 디자인실이 문을 열면서 사내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아파트의 구조 등 디자인을 두고 상품개발실과 경쟁 구도에 놓인 것. 결국 주택사업본부장이 최종 조율을 하지만 그 전까지 두 실에서는 치열한 디자인 경쟁을 벌이면서 시너지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삼성전자에서 휴대폰을 만들 때 무선사업부 디자인팀과 상품기획팀 간 치열한 내부 논의가 오가는 것도 이런 맥락. 계열사 간 디자인 경쟁도 볼거리다. 삼성전자와 삼성SDI 간, 삼성전자와 삼성테크윈 간 등 동일 아이템을 놓고 디자인 경쟁을 벌였던 점도 삼성그룹 디자인의 경쟁력을 확대시킨 중심축이 됐다.

조벽호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장은 “피 말리는 경쟁 체제로 당장은 당사자들 역시 고통스럽겠지만 시장에서 성공 이후 방향성을 다시 가늠해볼 수 있는 등 디자이너들의 역량 강화에 기폭제 역할을 한다”라고 설명했다.

비결 4 전문 인력 양성

이돈태 고문은 사실 삼성그룹과 인연이 깊다. 삼성전자가 93년에 처음 시작한 디자인 영재 후원 프로그램 ‘디자인 멤버십’ 1기 출신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디자인 인력의 중요성에 주목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영재 프로그램은 각 계열사로도 퍼져나가고 있다. 삼성건설 역시 2005년에 래미안디자인멤버십 1기를 선발한 이후 올해부터는 지원 분야와 상금(1등 1500만원)을 높여 디자인 인재들을 더욱 적극 영입한다는 계획이다.

제일모직은 세계 각지에서 활동 중인 한국 출신 유망 디자이너를 발굴, 지원한다는 취지 아래 지난 2005년 SFDF (Samsung Fashion & Design Fund)를 설립한 상황. 지금까지 총 5명의 신예 디자이너들이 수혜(1인당 10만달러)를 입었다.

SADI는 단연 삼성 디자인 인재양성의 핵심이다. 제일모직 사장 출신인 원대연 학장 취임 이래 보다 현장성을 강조하는 커리큘럼으로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특히 2007년 개설된 PD(상품디자인) 부문 출신 학생들은 iF 등 해외 전시회에서 매년 입상해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기도 했다.

원대연 학장은 “현장경험이 많은 교수진이 가르치다 보니 졸업생들이 삼성전자를 비롯, 100% 취업을 달성했다”라고 소개했다.

【 인터뷰 / 이돈태 삼성물산 건설부문 디자인고문(탠저린 사장) 】

Q> 미래 유산이 될 만한 디자인 추구

산업디자인이 전공인데 건설부문 참여가 이채롭다.

한국식의 사고가 아닐까 싶다. 디자인은 칼로 자르듯 분야가 명확하게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철학과 콘셉트를 가지고 있느냐다. 돈을 더 들여서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비용을 들이면서도 훨씬 더 좋은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이 관건이다. 종전 아파트가 그간 소비자들에게 불만이 많았던 것은 공통된 디자인에 대한 이해 없이 중구난방으로 하다 보니 발생한 문제였다. 이런 점을 디자인실과 상의하다 보니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것 같다.

Q> 래미안의 디자인 콘셉트는 뭔가.

퓨처 해리티지, 즉 현재의 모든 건축물은 ‘미래에서도 유산이 돼야 한다’란 철학이다. 그간 아파트는 판상형, 즉 성냥갑 같은 형태가 전부였다. 이는 공급자 위주의 편의성에 기반을 둔 철학이었다. 개인이 살 수 있는 가장 비싼 상품인 집이 소비자의 요구를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살면서 가치를 느끼고 후세에도 자랑할 수 있는 건축물에 대한 욕구를 해소하는 데 초점을 맞추다 보니 자연스레 남들과 다른 주거공간을 연출하는 데 일조하게 됐다.

Q> 타사 소속으로 바라본 삼성 분위기는.

외부 인재 영입 시 검증 절차가 매우 까다롭다. 하지만 일단 검증만 되면 이후에는 철저히 일을 맡기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준다. 대외비 수준의 정보도 서슴없이 제공하며 홍보용이 아니라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배려해준다. 한국의 디자인 수준은 대기업의 경우 세계 최고 수준을 넘어섰다고 보지만 중소기업은 고사 위기에 처한 것이 현실이다. 중소기업의 디자인 능력을 키우지 않으면 건물에 부족한 부분이 생기기 때문에 중소기업에 대한 디자인 역량을 높이기 위해 특정 기간 삼성에 납품하게 하는 조건으로 지원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2008. 10. 25. 22:41

[디자인 경영] 삼성그룹 … 보르도 TVㆍ햅틱폰 … 삼성魂을 담다

[디자인 경영]

삼성그룹 … 보르도 TVㆍ햅틱폰 … 삼성魂을 담다

#1.터치스크린 방식의 삼성전자 '햅틱폰'은 올해 초 국내 휴대폰 시장의 최고 히트상품이었다. 그러나 햅틱폰이 최초 디자인대로 나왔다면 히트상품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휴대폰은 개발 초기 통화와 종료 기능까지 터치스크린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제작됐다. 하지만 출시를 앞두고 실시한 사전 고객 평가에서 통화와 종료 기능은 누르기 편한 버튼 형태로 만드는 게 낫다는 지적이 나왔다. 결국 삼성전자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디자인을 수정,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사용자 편의성(UI)을 극대화한 전략이 먹혀든 셈이다.

#2.2006년 3월 첫선을 보인 삼성전자의 LCD TV '보르도'는 나오자마자 화제가 됐다. 'TV는 네모여야 한다'는 이전까지의 고정관념을 깨고 와인잔을 형상화한 듯한 파격적인 디자인을 갖췄기 때문.이 결과 보르도는 출시 1년4개월 만에 500만대나 팔릴 만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는 세계 평판 TV업계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삼성전자는 보로드의 인기를 발판삼아 일본 소니,샤프 등을 제치고 3년 연속 세계 TV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삼성그룹에서 디자인 경영은 이제 철학으로 자리잡고 있다. 삼성의 휴대폰과 TV가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른 비결도 바로 디자인 경영에 있다. 삼성이 디자인 경영을 본격화한 것은 12년 전.1993년 신경영 선언을 통해 양(量)에서 질(質)위주로 경영 패러다임을 바꿀 것을 지시했던 이건희 전 회장은 1996년 '디자인 혁명'을 선언했다. 그는 "우리 상품을 보면 '디자인 마인드'가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 아직도 제품을 기술적으로 완성한 뒤 거기에 첨가하는 미적 요소 정도로 디자인을 여기고 있다"고 경영진을 질타했다. 단순히 제품 외형을 예쁘게 치장하는 게 아니라 삼성만의 혼을 담은 디자인을 만들어내라는 요구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5년.이 전 회장은 제2의 디자인 혁명 선언이라 할 수 있는 '밀라노 선언'을 발표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그룹 각 계열사 최고경영진을 불러모은 그는 "CEO부터 현장 사원까지 디자인의 의미와 중요성을 새롭게 재인식해 세계 일류의 명품을 만들 것"을 강조했다. 독창적인 디자인과 사용자 편의성을 높인 제품 개발,디자인 핵심인력 확보,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조직문화 조성 등이 밀라노 선언에서 나온 전략이었다.

삼성은 이런 디자인 철학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양한 디자인 연구조직도 만들었다. 대표적인 게 삼성전자 디자인경영센터.2001년에 만들어진 이 조직은 소비자들이 원하는 바를 미리 파악한 뒤 이를 토대로 제품을 개발하는 곳이다. 삼성전자 휴대폰으로는 처음으로 누적 판매량 1000만대를 돌파했던 'T100'(일명 이건희폰)과 보르도 LCD TV 등이 이곳을 통해 개발됐다. 삼성은 또 미국(LA,샌프란시스코),영국(런던),이탈리아(밀라노),일본(도쿄),중국(상하이) 등 5개국에 글로벌 디자인연구소를 두고 있다.

디자인에 대한 최고경영자의 관심과 풍부한 연구조직은 삼성 제품의 경쟁력을 일거에 높이는 원동력이 됐다. 보르도 LCD TV,블루블랙폰,햅틱폰 등은 모두 이런 디자인 철학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해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삼성전자는 세계 최고 권위의 디자인 공모전인 IDEA(Industrial Design Excellence Awards)에서 1997년부터 작년까지 총 35개 제품으로 수상했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

출처 : 한국경제신문